#지적장애가 있는 A양(당시 13세)은 2014년 6월 어머니의 휴대전화를 망가뜨린 일로 혼날까봐 두려워 가출했다. 하지만 마땅히 갈 데가 없자 인터넷을 통해 잠자리를 제공해주겠다는 성인 남성들을 만났다. A양은 이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했지만 잠자리를 제공받고 먼저 찾아갔다는 이유 등으로 수사기관은 사건을 성매매로 분류했다. 결국 이듬해까지 전국 법원을 돌며 자신이 성폭행당한 사실을 입증해야 했던 A양은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병원 신세까지 졌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재판과정에서 A양 어머니가 너무 비참해하며 못견뎌 했다”고 전했다.

유사한 사건이 지난 16일 새로 시행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청법)이 적용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개정된 아청법으로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성인 남성은 처벌을 받고, 해당 청소년은 성폭행 피해자로 보호받을 수 있다. 다만 피해자가 ‘궁박(窮迫)한 상태’였다는 점이 인정돼야 한다. 피해 청소년이 성폭행 당시 경제적·정신적으로 빈곤한 처지였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는 얘기다. 2차 피해 등의 우려가 불가피할 수 있다. 아청법 개정안에 대해 일부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반발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이다. 반면 처벌 범위가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반론도 나온다.
◆여성단체 “‘궁박’이란 조건이 지나치게 모호…입증 과정서 2차 피해 우려”
27일 법조계에 따르면 최근 시행된 아청법 개정안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시민단체들은 성매매에 연루된 피해 아동이 수사·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이달부터 시행된 아청법 8조의2는 ‘성인이 13세 이상 16세 미만 아동·청소년의 궁박한 상태를 이용해 간음할 경우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했다. 또 궁박한 상태를 이용해 추행한 경우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해당 개정안 지난 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이달 16일부터 시행됐다.

여성단체에선 성매수자의 처벌 여부를 결정할 ‘궁박한 상태’란 구성요건이 지나치게 모호하다고 주장한다. 결국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 아동이 성매매 당시 ‘자신이 얼마나 빈곤한 상태였는지’를 설명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2차 피해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서혜진 변호사는 “형사사건인 만큼 수사기관이 피해 아동이 성매매 당시 궁박한 상태란 점을 입증해야 한다”며 “수사 과정에서 빈곤 여부를 피해 아동을 통해 확인할 텐데 2차 피해가 발생할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법률에도 민사에서만 ‘궁박한 상태’란 판례가 명확히 형성됐다. 민법 104조는 당사자의 궁박, 경솔 또는 무경험으로 인하여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 2002년 10월 대법원은 민사상 궁박은 ‘급박한 곤궁’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경제적 원인에 기인할 수도 있고 정신적 또는 심리적 원인에 기인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아청법 사건 ‘궁박한 상태’ 대법원 판례도 없어···성매매 피해 아동 수사·재판과정서 고통 호소
다만 아청법에서 구성요건인 궁박한 상태를 둘러싸곤 아직 대법원 판례가 없다. 향후 치열한 법리공방이 예상된다. 결국 수사·재판 과정에서 제2의 A양 사건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실제 성매매 피해 아동은 경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고통을 호소한다.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아동·청소년 성매매 환경 및 인권 실태조사 결과 발표 및 토론회’ 자료집에 따르면, 성매매 조사를 받은 아동·청소년 53명 중 43.4%(복수응답)가 수사기관 조사 과정에서 무시하는 태도를 경험했고, 34.0%가 범죄자 취급을 당했다고 응답했다. 13.2%는 폭언과 협박 등 강압적 태도를 느꼈다고 한다.

한국여성변호사회 김현아 변호사는 “몇 끼를 굶어야 궁박인지, 얼마나 돈이 없어야 궁박인지 등 법의 집행이 어떻게 이뤄질지 의문“이라며 “일반 가정에서 폭력을 당하던 중 가출이 아닌 채팅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성인 남성을 만났을 때 궁박하지 않다고 볼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궁박’ 조건 안 붙이면 처벌 범위 지나치게 커져” 반박론도
처벌 범위가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반론도 나온다. 16세 미만 아동의 성을 보호하는 것을 필요하지만 ‘궁박한 상태’란 구성요건이 없으면 가벌성(可罰性·어떤 처벌이 가해질 수 있는 특성)이 과도해진다는 것이다. 13세 이상 16세 미만 아동과 성인 남성이 성관계를 맺었다고 무조건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13세 미만과 성인이 성관계를 맺으면 처벌하는 ‘미성년자의제강간죄’의 기준 연령을 높이는 것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며 “다만 13세 이상 16세 미만 아동의 성(姓)도 보호가 필요한 만큼 심리적·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황을 이용해 성관계 맺을 경우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수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성관계 자체만으로 처벌하는 미성년자 의제강간죄의 가벌 영역을 넓이면 일반 강간죄 등 다른 성범죄 형벌과 형평성 문제가 생긴다”며 “합의하에 성관계를 맺어도 처벌할 수 있는 아동의 연령대를 높이면서 궁박한 상태를 이용한 성관계란 조건을 붙인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염유섭 기자 yuseob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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