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보호는 물론 인간을 성장시켜
다양한 분야 네트워크화… 지식 교환
서울새활용플라자, 국내 ‘허브’ 역할
40여개 입주기업들, 물품 제작·연구
블랙핑크 한복·BTS 굿즈 등 만들어

“다섯 살 때쯤, 부모님이 집을 비우신 틈을 타 나는 작은 라디오를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우리 집에 한 대뿐이었던, 가족 모두가 함께 쓰는 라디오였다. 나는 어디서 들은 대로 일단 플러그를 뽑은 후, 드라이버를 집어 들고 라디오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라디오 수리는 실패했고, 라디오 내부가 하나의 스피커로 이루어져 있음을 겨우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다. 어쨌거나 라디오를 다시 조립할 수 없었고, 남은 것은 부모님의 불호령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분은 전혀 달리 말씀하셨다. ‘뭐든 호기심을 가지고 알고 싶어 하는 아이는 나중에 뭐가 되도 된단다.’”(볼프강 M 헤클의 책 ‘리페어 컬처’에서)
수리하고 수선하는 행위는 환경보호라는 목적을 갖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을 성장시키고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이 ‘리페어 컬처’를 주창하는 이들의 설명이다.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국립독일박물관 관장인 헤클은 “나를 둘러싼 사물에 대한 태도가 곧 인간으로서의 나를 말해준다”고 역설한다. 물건을 고치고 다루는 일은 우리에게 지식과 능력, 분석적 사고를 요구할 뿐 아니라 삶의 지혜와 가치관, 세심함 등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근대 독일 교육이념의 토대가 된 빌헬름 폰 훔볼트의 ‘자기와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과도 맞닿아있다.
리페어 컬처는 꽤 현실적이다. 낡으면 버리고 새로운 제품을 쓰는 것. 명백히 한정된 자원 속에서 이런 ‘사치’는 언제까지고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에서 리페어 컬처는 비롯했다. 이는 업사이클링(Upcycling), 제로웨이스트(Zerowaste) 운동과 연결된다. 우리의 미래와 다음 세대의 미래를 고려한 실천 운동이 발전해 쓰고 버리는 ‘과잉 소비’ 시대에 저항하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다.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는 리페어 컬처
리페어 컬처의 시작은 2009년 10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문을 연 ‘HUU’라는 이름의 리페어 카페였다. 기자 출신인 마르티네 포스트마가 만든 이곳은 네덜란드 디자이너들이 쓴 ‘리페어 선언(Repair Manifesto)’의 영향을 받았다. 이 선언은 ‘기술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며, 기술을 제대로 부릴 수 있어야 한다’는 호소가 담겼다.

리페어 카페에서는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물건 고치는 법을 함께 연구하고, 업사이클(쓸모없거나 버려지는 물건을 새롭게 디자인해 질적·환경적 가치가 높은 물건으로 재탄생시키는 재활용 방식) 하는 법을 서로 가르쳐줬다. 자연스럽게 제품의 가격과 수명의 관계 같은 문제를 두고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지구와 환경에 대한 고민도 나눴다. 그렇게 고쳐 쓰기는 하나의 문화 비판적인 자세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왜 쓸만 한데도 고쳐 쓰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품고있던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4년 만에 네덜란드에만 50여개의 리페어 카페가 생겨났고, 벨기에와 프랑스, 미국, 독일에도 이런 생각이 퍼져나갔다. 형태도 다양해졌다. 독일의 한 리페어 카페 ‘HUIJ’에서는 한 노부인이 ‘잼 만들기’ 혹은 ‘비누 만들기’ 같은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베란다에서 서양갓냉이나 다른 채소를 키우면서 ‘자급자족’까지 주제를 확장하기도 했다. 또 다른 리페어 카페 ‘FabLab’은 하이테크 공방으로 불린다. 다양한 전문 분야의 네트워크화를 지향하며 지식을 교환하고 창의적인 활동에 주력하는 게 목표다.
◆한국의 리페어 컬처를 주도하는 서울새활용플라자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서울새활용플라자는 우리나라 리페어 컬처를 주도하는 허브로 자리 잡았다. 새활용의 모든 것을 보고,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새활용 복합문화 공간을 자랑하는 이곳은 2017년 9월 개관해 지난해까지 4년 동안 43만218명이 방문하고, 17만6765명이 교육에 참여했다. 체험·탐방 등 교육 프로그램은 새활용 문화 확산을 위한 역점 사업 중 하나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최소한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하반기부터는 상황에 따라 대면 프로그램을 종전보다 확대할 예정이다.

새활용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새활용사업팀 임주경씨는 “가장 반응이 좋은 것은 직접 소재를 해체하고 다시 만들어보는 체험 프로그램”이라면서 “아무래도 환경 문제 가운데서도 아직 새활용은 조금 생소한 개념인데 체험 프로그램은 참여도나 관심이 높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다시 방문하고 싶다는 문의도 있고 선생님이 체험해보시고 학생들도 방문시키고 싶다고 하시는 등 반응이 좋다”며 “교육청 등을 통해서 단체 관람, 체험 문의도 이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새활용 문화를 이끌어 갈 ‘새활용 장인’들에 대한 지원에도 적극적이다. 새활용을 위한 소재은행, 세척실, 3D프린터 등 최첨단 설비까지 모두 마련돼있다. 서울새활용플라자 3층과 4층에는 40여 개 입주기업들이 물품을 제작하고 연구하는 공방도 있다. 시민들은 이곳에 들러 제작과정과 작품을 구경한 뒤 직접 구매도 할 수 있다.
◆단하주단·큐클리프 등 성공한 새활용 스타트업도
서울새활용플라자에 입주한 뒤 성공을 거둔 새활용 장인들도 많다. 이곳에 입주하면 개인 단위의 소규모 업체로는 성사시키기 어려운 대기업 등과의 협업 등 기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곳이 블랙핑크, 오마이걸 등 K팝 스타들이 입고 나와 화제가 됐던 ‘단하주단’과 방탄소년단(BTS) 챌린지 리워드 굿즈를 제작했던 ‘큐클리프’다. 중고 한복, 폐의류로 신한복을 제작하는 단하주단은 블랙핑크 ‘하우 유 라이크 댓(How You Like That)’ 뮤직비디오 의상을 제작해 한류 팬들에게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복진흥센터로부터 ‘2021년 한복문화 진흥 유공자’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현대자동차와 협업해 BTS 챌린지 리워드 굿즈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큐클리프는 우산이나 현수막, 텐트 등 버려지는 방수천을 활용해 지갑, 가방 등 패션 제품을 만든다. 최근에는 제품들을 해외로 배송하는 등 글로벌 새활용 업체로 거듭나는 중이다.
조성민 기자 josungm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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