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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모의창의적글쓰기] 괜찮아요, 나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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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7-14 23:40:03 수정 : 2022-07-14 23:4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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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출판계를 보면 편집인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그중에서도 논픽션 작가 존 맥피가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뉴요커’ 편집인 여러 명과 얽힌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 로버트 빙엄에 관한 것도 있다. 로버트 빙엄은 1982년 사망할 때까지 ‘뉴요커’ 편집인으로 있었는데 대부분의 생애를 그곳에서 원고를 수정하고 검토하면서 보냈다. 그는 엄격한 편집자였고 자료 검토와 원고 교정에 철저했다. 한 예로 그는 필자들의 현장 답사나 연구 조사에는 동행하지 않았다. 혹시나 자신이 원고를 검토할 때 독자의 시각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존 맥피는 플로리다 오렌지에 관한 주제로 1년간 준비한 논픽션 원고를 로버트 빙엄에게 보낸 적이 있다. 그런데 얼마 후 수정되어 돌아온 것은 단지 15%만 남은 얄팍한 원고 뭉치였다. 1년간 준비한 논픽션 기사의 85%를 삭제한 것이다. 존 맥피는 자신의 책에서 이 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기차역에서 압축기에서 짠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서 그를 원망했다고 말했다. 이후 존 맥피는 로버트 빙엄을 ‘단형압축기’라고 불렀다.

대다수 편집인이 그렇듯 로버트 빙엄은 순수하고 성실했다. 글을 쓰는 시작부터 완성되어 발표할 때까지 자신의 생각을 필자에게 조언하고 필자의 판단을 기다렸다. 좋은 편집인은 필자에게 글이 가야 할 방향을 알려줄 뿐 아니라 좌절과 방황 속에 있을 때 힘과 용기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글의 진행 방향이나 주제나 내용이 잘못될 때 이를 냉철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편집자와 필자가 글에 관한 평가가 서로 달라 결별하는 경우도 흔히 있다. 존 맥피도 자신의 글에 관해 확신이 있으면 편집인과의 논쟁에서 밀리지 말라고 권하고 있다. 그도 로버트 빙엄과 논쟁하여 오렌지에 관한 원고 일부분을 복원할 수 있었다.

지난해 나도 책을 기획하면서 출판사에 좋은 편집인이 있으면 같이 상의하면서 진행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돌아온 대답은 힘들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대형 출판사가 아니면 필자를 도와주는 편집인을 만나기가 힘들다. 최근 출판계가 위축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필자는 글을 쓰다 보면 절망하거나 좌절에 빠질 때가 많다. 그럴 때 나는 옆에서 편집인이 전해주는 따뜻한 말을 듣고 싶다. “괜찮아요.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정희모 연세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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