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스나 기름 보일러가 없던 시절, 한겨울에 연탄불을 꺼뜨리면 낭패를 봤다. 인심 좋은 이웃집에서 불이 활활 붙은 연탄을 빌려주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을 땐 꼼짝없이 냉골에서 자야 했다. 그런 애로를 해결해 준 것이 번개탄이다. 대부분 7080세대는 연탄불을 붙이기 위해 번개탄을 써 본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번개탄은 마른 톱밥과 숯가루를 밀가루·전분 등으로 만든 풀을 넣어 뭉쳐 놓은 숯의 일종이다. 정식 명칭은 착화탄이지만 번개탄이라는 상표명이 널리 퍼져 일반명사가 됐다. 지금도 연탄으로 난방하는 취약계층들은 불쏘시개로 사용하고 있다.
이토록 생활친화적인 물품이지만 번개탄을 피워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가 늘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통계청이 집계한 자살 사망 수단을 보면 가스중독이 15.1%에 이르는데, 대다수가 번개탄을 이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가스중독 사망자는 2021년 2022명으로, 이 가운데 번개탄을 피워 숨진 사람이 1763명(87.2%)에 이를 만큼 높다. 2011년 번개탄을 이용한 자살 사망자가 1165명인 것과 비교하면 10년 동안 약 600명이나 늘었다.
정부가 자살방지 대책의 하나로 산화형 착화제가 사용된 번개탄 생산을 금지하겠다고 해 논란이 일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최근 제5차 자살예방 기본계획안(2023~2027년)을 통해 자살률을 30% 줄이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1등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목표를 내놨다. 이 번개탄은 온라인 유통과 판매 제한을 하기 어려워 개인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점이 문제라고 했다. 자살위해 물건 관리를 강화하면 일부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논란이 확산되자 정부는 모든 번개탄을 생산금지하는 건 아니며 2019년 이미 법으로 정해져 예고된 내용이라고 해명했다.
그렇지만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 번개탄이 없다고 포기할까.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많다고 한강 다리를 모두 폐쇄하겠다는 것과 뭐가 다른가. SNS에는 “소가 웃을 일”, “현실성이 없는 황당한 대책”이란 비아냥이 나온다. 자살이 한국의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회피한 채 수단만 규제하는 탁상행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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