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살게 되면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브라질이 현지에 살 때보다도 오히려 이곳 뉴욕에서 선명하고 확실하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가족이나 브라질 여성들이 굉장히 다른 삶을 살고 있고, 자신 역시 주위의 작가들과 굉장히 다른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역시.
“저는 그때 태어난 곳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삶에서 만약에, 라는 질문이 많은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여성이 똑똑하지만 태어난 곳에서 자아실현을 할 수 없는 곳이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인생에서 많은 여성들을 만났어요. 그 가운데 똑똑하지만 자아실현을 할 수 없는 곳에서 태어나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한 여성들도 아주 많이 마주했거든요.”
어느 순간, 브라질 출신 마르타 바탈랴(Martha Batalha)는 자신이 잘 아는 1950, 60년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를 배경으로 똑똑하지만 여러 제약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지 못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브라질에선 출판사를 운영한 경험도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쓴 책은 처음이었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야기를 꼼꼼하게 설계해 쓰는 게 아니라 직관적으로 쓰는 편이어서, 쓰는 동안 자신이 정말 작가가 맞나, 라는 생각하기도 했다.
“책의 전체적인 문체와 이야기하는 화자의 톤을 설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부장제를 조롱하고 놀리는 아이러니한 화자를 설정했지요. 개인적으로 사람들이나 사회가 집단적인 트라우마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관심이 많았어요. 브라질의 경우 집단 트라우마에 조금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대처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방법을 사용했지요. 상처 입은 자신을 조금 더 가볍고 유머러스하게 바라보면 문제도 조금 가볍게 느껴지기 때문에 이 방법을 사용했던 것 같아요.”
마르타 바탈랴는 2016년 가부장제의 억압과 편견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에우리지시와 기다 두 자매의 이야기를 동화 같은 필체로 그린 첫 장편소설 『보이지 않는 삶』을 펴냈다. 책은 자부티문학상을 비롯해 상파울루상, 더블린문학상 등 수많은 문학상 후보에 올랐고, 전 세계 18개에서 번역 출간됐으며, 2019년 영화로 제작돼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수상했다. 2019년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김정아 옮김, 은행나무)됐다.
에우리지시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작은 동네 치주카에서 은행원 남편 안테노르와 아들 아폰수, 딸 세실리아와 함께 안정적인 삶을 꾸려간다. 어느 순간 인생의 공허를 느끼고 요리책 한 권을 완성하지만 “가정주부가 쓴 책을 누가 본다고 그래? 이쑤시개나 갖다 줘”라는 남편의 말 한마디로 끝나고, 다시 동네 최고의 재봉사로 거듭나지만 역시 남편에게 들켜 수포로 돌아간다.
아름다운 외모로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언니 기다는 자신을 버린 남편 때문에 경제활동과 육아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이중고에 빠진다. 기다는 강인한 생활력으로 일을 다시 구하고 여성 공동체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에우리지시 역시 자신을 옥죄는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새 자아를 시도하는데.
“확실한 한 가지는, 다시 한 번 갈 곳 잃은 공허한 눈빛을 하기 시작한 에우리지시의 안에서 무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었다. 에우리지시는 이제 무를 바라본다기보다는, 어떤 느낌을 다시 느끼기 위해 앉은 자리를 지켰다. 그 느낌은 서서히 다가와, 고요 속에 터를 잡고 점점 자라나기 시작했다. 커질 대로 커진 느낌은 마침내 에우리지시의 눈에 들어왔고, 에우리지시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 느낌은 바로 볼 줄 아는 능력이었다. 에우리지시는 책장에 꽂힌 책을 보았다. 그녀는 책장을 보았다⋯.”(204쪽)
소설은 여성 차별의 서사가 세계 보편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해준다. 특히 가부장제를 향한 재미있는 유머야말로 무거운 주제를 즐거운 마음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든다.
브라질 작가 바탈랴는 왜 다시 가부장제에 맞서는 두 여성 이야기를 해야만 했을까. 그가 보여주는 여성 차별의 서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서울국제작가축제를 위해 방한한 바탈랴를 통역사 김한결씨의 도움을 받아 지난 9일 서울 용산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왜 현재가 아닌 1950, 60년대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를 배경으로 한 것인지.
“여성들이 자아실현 하기가 지금보다는 당시가 훨씬 더 어려워 당시의 브라질을 그리고 싶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는가) 지금 많이 변화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여전히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여성 살인율은 굉장히 높고, 브라질 내 지역에 따라서 차이도 많이 난다. 사회적 지위나 여성의 나이에 따라서도 차이가 나고. 역사적으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는데, 포르투갈이 보수적 사회여서 그 영향을 받은 것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 에우리지시나 기다의 실제 모델이 있는가.
“책에 나오는 두 자매 이야기는 그동안 알고 지냈거나 만났던 여성들의 삶을 모아놓은 것이다. 한 두 명의 실제 모델이 있다기보다는 만났던 모든 여자들이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렸을 때 할머니로부터 요리책을 받았는데, 할머니처럼 요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기분이 좋았다. 처음 본 것은 오리 레시피였다. 첫 번째, 오리를 사라, 두 번째, 오리를 죽여라⋯. 너무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해야 한다니. 여성들이 오리요리 하나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고, 사람들이 요리를 평가 절하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집에서 하는 일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그때부터 하게 됐다. 그래서 책에 요리에 관련된 장면을 많이 넣게 되었다.”
―애정이 갔던 인물이나 캐릭터는 누구인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젤리아다. 제가 카톨릭학교에서 수녀들과 함께 자랐다. 당시에 수녀들을 봤을 때 인생이 쓸쓸하다거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몇몇 분들은 행복해 보였지만, 몇몇 분들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런 면이 젤리아를 좋아하는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에우리지시에게 독서와 글쓰기, 타자기는 무엇일까.
“에우리지시가 자아실현을 하는 방식으로서 책을 읽고 타자기로 글을 쓰는 장면을 넣은 것은 맞다. 다만 의도적으로 열린 결말을 맺었는데, 그것은 독자들이 결말을 상상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해피엔딩으로 끝내지 않았던 이유는 에우리지시와 같은 삶을 사는 여성들이 해피엔딩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해피엔딩으로 끝내게 된다면 그건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언니 기다의 삶은 어디로 갈까.
“자신의 원하는 삶을 완벽하게 살았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럼에도 인생에서 커다란 포부를 가지고 있던 캐릭터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그런 삶을 살지 않을까.”
―혹시 한국 독자들에게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저는 비록 브라질 여성 이야기를 했지만, 대한민국 여성들은 물론 전 세계 여성 독자 모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어떤 나라에 살고 있든지, 여성들의 경험은 모두 유사하고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의 배경은 브라질이지만, 대한민국 여성들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어, 이거 우리 할머니 이야기인데. 이거 우리 고모 이야기인데, 라고. 책을 읽고 나면, 다른 나라 여성들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둘째 모든 여성들이 똑같은 경험을 하고 있구나라고 공감할 것이다.”
뉴욕으로 이주한 뒤, 한동안 출판사에서 일을 했다. 브라질에서도 기자를 하면서 출판사를 운영했던 그였다. 뉴욕대에 석사과정 입학 허가를 받을 즈음, 브라질 출판사를 팔 수 있었다. 뉴욕에선 푸에리토리코 출신의 남편을 운명적으로 만났다.
뉴욕이라는 다른 문화 속에서 살면서 익명성에 갇혀 그냥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은 자국의 언어로 글을 쓰는 일이었다. 특별한 준비를 하거나 트레이닝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가 바탈랴의 원점이었다.
책을 다 쓰고 나자 처음 많은 브라질 출판사들은 자신의 첫 소설을 출판하기를 거절했다. 거의 포기 직전까지 갔지만, 마침 독일의 출판사가 판권을 사면서 첫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1973년 브라질 헤시피에서 태어나서 리우데자네이루의 작은 동네 치주카에서 자란 마르타 바탈랴는 2016년 첫 장편소설 『보이지 않는 삶(A vida invisível de Eurídice Gusmão)』을 출간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성은 없었다(Nunca houve um Castelo)』 등을 펴냈다.
“첫 책 출간 이후 두 권을 더 출간했습니다. 모두 한국어로 번역이 되진 않았죠. 최근 성장 소설 하나를 쓰기도 했어요. 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고, 글 쓰는 것을 굉장히 즐기고 있습니다.”
―소설 쓰기의 중요한 원칙이나 방법이 있는지.
“어려운 질문이다. 우리가 악기를 연주할 때 연주하는 악기가 음악과 잘 어울리지 않으면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글을 쓰다 보면 전체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직관이 될 때가 있는데, 악기 연주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술적으로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 기본이다. 매일매일 글쓰기 훈련을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작가로서 포부나 희망이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글쓰기는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다. 다행히 에우리지시가 아니어서 글을 계속해 쓸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좋다(웃음).”
―하루 글쓰기나 생활 루틴은 어떤가.
“인터넷의 사용하지 않고 매일매일 글을 쓴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4시간 정도 쓴다. 자녀가 둘이 있어서 아이들을 케어하고 책을 많이 읽는다. (특별한 취미가 있는지)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보드 서핑을 한다. 요가도 하고 명상도 한다.”
나이스! 인터뷰는 그가 스페인어가 박힌 기자의 티셔츠에 대해 기쁨의 말을 연발하면서 시작됐다. 깊은 눈과 사려 깊은 주름이 인상적인 그의 얼굴에선 다정한 웃음과 표정이 그치지 않았다. 가끔씩 유머러스한 대답도 나왔다. 영어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다행히 몇 번은 웃을 수 있었다.
뉴욕에서 6년 정도 살다가 현재는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신문사에 글을 쓰면서 남편 및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며칠 전 처음 방한한 그는 이번 주까지 파란만장한 도시 서울에서 보낼 예정이다. “한국 문학을 많이 접해보진 못했습니다. 이번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흥미로운 작가들을 많이 만났어요. 앞으로 많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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