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하는 사람들이 기후 관련 문제에 대개 ‘단기적으로 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북극곰이 어렵다는 건 알겠는데 당장 우리가 표를 얻는 데 뭔 도움이 되겠냐’는 식의 접근이다. 그런데 정치가 중요한 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결단을 책임지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단기간의 표에 크게 도움이 안 되더라도 계획적으로 중요한 이슈에 대해 논의하고 준비해야 한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달 27일 기후 관련 공약을 발표한 자리에서 한 말이다. 맞는 얘기다. 득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는 기준에 따라 ‘북극곰’ ‘기후위기’ ‘지구적 재난’은 선거때마다 늘 뒷전으로 밀렸다. 여당 대표인 한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그런 여의도식 계산과는 다른 정당이 되겠다고 했다. 실상은 그러나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탄소중립 사회 실현을 위해 추진돼야할 기후대응 관련 프로그램이 줄줄이 예산 삭감으로 휘청이고 있다. ‘올 기후기금 대폭 삭감, 녹색 R&D 사업 직격탄’ (2월29일자·이희경 기자) 기사는 기후대응 예산을 늘려가는 주요 선진국 흐름과 달리 관련 예산을 삭감한 ‘역주행’ 실태를 지적하고 있다. 본지가 기후대응기금에 포함된 프로그램 사업 142개를 전수조사한 결과 84개 사업 지출 규모가 지난해에 비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숲조성 사업도, 녹색기술 사업도 삭감
기후대응기금은 기후위기 대응 및 탄소중립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하기 위해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에 따라 2022년 처음 설립됐다. 2023년 예산은 2조4867억원이었고, 2024년 정부 예산은 2조4158억원이었으나 국회 심의 과정을 거쳐 2조3918억원으로 확정됐다. 지난해 보다 949억원이 줄어든 것이다. 예산 규모가 이렇게 줄어드니 관련 예산들도 전반적으로 칼질을 당했다. 도시열섬을 줄이고 미세먼지를 낮추기 위해 도심에 숲을 조성하는 ‘탄소중립도시숲조성 사업’, 순천만국가정원처럼 생태계 훼손지를 복원하는 ‘도시생태복원사업’, ‘공공건축물그린리모델링’ 사업 등이 모두 지난해에 비해 지출 규모가 크게 줄었다.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 명칭에서도 드러나듯이 전지구적인 기후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려면 지구온난화 주범인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고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녹색기술 개발에 상당한 예산이 투자돼야한다. 하지만 ‘녹색성장’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이명박정부 이래로 재생에너지, 신기술 비중은 크게 늘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상당 규모의 정부 지원이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미국과 유럽, 일본은 선제적으로 대규모 재정을 기후위기 대응 및 녹색성장에 쏟고 있다. 앞으로 생산, 수송, 사용, 폐기 단계에서 제품의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게 기업, 국가 경쟁력이 되는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흐름을 감안하면 올해 기후대응기금 예산 삭감과 그에 따른 중소기업 녹색 R&D사업 축소는 미래 대한민국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자초할 수 있다.

◆기후대응 정책도, 관련 투자도 하위권
우리나라는 기후대응기금을 마련할 법적 토대를 마련했고 대외적으로 온실가스 감축 목표, 탄소중립 2050 목표 달성을 선언했다. 그런데도 국제환경단체들로부터 ‘기후악당국’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석유 등 화석연료를 대체할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적은데다 온실가스 배출량, 석탄 발전소 가동률도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국제 평가기관인 저먼워치와 기후 연구단체인 뉴클라이밋 연구소, 환경단체 클라이밋액션네트워크(CAN) 인터내셔널이 지난해 연말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발표한 주요국 기후변화대응지수(CCPI) 평가에서 한국은 유럽연합(EU)을 포함한 64개국 가운데 61위를 기록했다. 한국보다 후 순위에 있는 나라는 아랍에미리트와 이란·사우디아라비아 등 모두 산유국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꼴찌나 마찬가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산업화 이후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1.5도 이내로 제한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내총생산(GDP)의 1.9% 이상 투자가 필요하다고 제안했지만, 현재 우리나라 투자 비중은 0.1%대에 불과하다. 요즘 젊은 세대가 환경, 연금 등 미래 이슈에 관심을 많이 보이면서 정치권이 기후 위기 관련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여야 모두 예산을 늘리겠다고 한다. 국민의힘은 2조원대인 기후대응기금 규모를 2027년까지 5조원으로, 탄소감축을 위한 인센티브를 연간 최대 7만원에서 50만원까지 늘리겠다고 했다. 민주당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문재인정부 수준으로 복원하고 관련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 예산국회에서 기후대응기금을 200억원대를 삭감한 행태를 감안하면 ‘공약 따로, 정책 따로’일 공산이 크다.

P.S. 취재한 이희경 기자에 물었습니다.
-올해 기후대응기금 규모가 많이 삭감된 배경은.
“올해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이 26조5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4조6000억원(4.7%) 삭감된 여파다. 기후대응기금은 인건비 등을 제외하고 전체 142개 사업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 ‘탄소중립기반구축’ 부문이 83개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탄소중립기반구축 부문은 전체의 84% 정도가 녹색기술과 관련된 R&D 사업이다. 올해 전체 R&D 예산이 이례적으로 크게 삭감되면서 71개 R&D 사업 중 53개가 유탄을 맞게 된 것이다.”
-정부는 어떤 기준으로 기후대응기금 사업을 삭감한 건지.
“기후대응기금을 인위적으로 구조조정하진 않았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탄소중립 사회 이행을 위해 기후대응기금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알지만 긴축 기조에 따라 자연스럽게 소폭 조정됐다는 취지다. 문제는 삭감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점이다. 환경 전문가들은 탄소흡수원조성 및 지역공정 전환 등 시민들의 삶이나 미래 녹색기술 확보와 관련된 사업들의 지출 규모가 줄어든 점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산업부의 온실가스 국제감축사업은 63억여원에서 387억여원으로 크게 늘었는데 증액 사업 선정 기준 역시 모호한 점이 있다.”
-여당은 기후대응기금을 2027년까지 5조원으로 확대한다고 공약했는데.
“실효성에 의문이 든다. 국민의힘 총선공약에는 기후대응기금 수입구조 정상화를 위한 세부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가장 큰 기후대응기금 문제는 자체 수입원이 매우 빈약하다는 점이다. 기후대응기금의 자체 수입원은 온실가스 배출권이 사실상 유일하다. 전체 수입 중 16%(2023년 계획 기준) 정도에 불과하다. 다른 회계나 기금 등 외부 재원을 끌어다 기후대응기금 수입을 메우는 셈이다. 결국 온실가스 배출권을 통한 자체 수입이 늘어나도록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배출권은 탄소 등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정부가 기업이나 기관에 할당하는 것인데 돈을 받는 유상할당 비중은 10% 정도 밖에 안 된다. 정부가 산업계 눈치를 보느라 유상할당 비율을 늘리지 못하고 있어서다. 이런 근본적인 제도 개혁 없이 기금만 늘리겠다는 건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는 얘기다.”
황정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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