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벌판서 일궈낸 결실/1980년대부터 40년간 나무 등 심어/야생화 등 600여종 정원 탄생/팜파스그라스 울창 국내 최대 규모/핑크뮬리 정원 등 다채로운 볼거리
나올 것 같은 영화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 황금삼나무길.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솟아오른 메타세쿼이아. 어른 얼굴 두배 크기의 연잎이 가득 펼쳐진 수생정원. 가을 단풍보다 더 붉게 타오르는 홍가시나무. 그리고 낭만 가득한 모네와 밀레의 정원까지. 충남 태안군 청산수목원으로 들어서니 ‘태안의 보석’이란 별명처럼 아기자기한 비밀의 정원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하지만 저절로 얻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야산과 논이던 허허벌판을 중부권 최고의 민간 수목원으로 가꾸기까지는 무려 4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나무와 꽃을 지극히 사랑한 형제의 열정 덕분이다. 신형철(60) 청산수목원 원장과 함께 여심을 홀리는 핑크뮬리와 팜파스그라스 가득 핀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세월싸움에서 건져 올린 수목원
청산수목원으로 들어서자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린 신 원장이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반가운 얼굴로 맞는다. 매일 수목원을 돌보다 보니 얼굴 돌볼 시간은 전혀 없단다. 평일인데도 주차장은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차들로 가득 찼다. 11월 말까지 진행되는 핑크뮬리축제와 팜파스그라스축제 때문이다.
신 원장을 따라 수목원으로 들어서자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높이 2~3m의 서양 억새 팜파스그라스가 울창한 숲을 이뤄 탄성이 저절로 터진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과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살랑살랑 춤을 추는 은백색 팜파스그라스가 그려내는 가을풍경이라니. 거실에 걸어 놓고 마음이 번잡할 때마다 들여다보고 싶은 아름다운 수채화다. 이렇게 예쁜 풍경을 놓칠 수 없다. 연인들은 줄을 서서 인생 최고의 순간을 사진으로 담기 바쁘다. 결혼을 앞둔 커플들도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웨딩화보를 촬영하느라 분주하다. 수목원에 조성된 4곳의 핑크뮬리 정원은 나풀거리는 원피스와 챙 넓은 모자로 한껏 멋을 낸 여인들이 점령했다. 신 원장에게 핑크뮬리 꽃밭에서 사진 한 장 찍자고 요청했다. 꽃밭 속으로 걸어 들어가 웃는 그의 얼굴은 수줍음에 핑크뮬리보다 더 붉어진다.
태안군 남면의 청산수목원은 연간 20만명이 찾는 민간 정원이다. 13만㎡의 방대한 면적에 황금삼나무, 홍가시나무, 앵초, 창포, 부들 등 나무와 야생화 600여종이 자라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연꽃 품종도 보유하고 있다. 홍가시축제, 꽃창포축제, 수국축제, 연꽃축제, 팜파스그라스축제, 핑크뮬리축제 등 다양한 축제가 일년 내내 이어진다. 이처럼 지금은 태안을 대표하는 여행지로 인기가 높지만 이런 수목원으로 완성되기까지는 무려 40년이 넘게 걸렸다.
“원래 이곳은 선조들이 물려준 야산과 논이었답니다. 자연스럽게 큰 형님이 다양한 농사를 지었죠. 버섯, 파인애플, 포도 등 안 해 본 농사가 없을 정도예요. 그런데 소득이 갈수록 줄더군요. 이에 고심 끝에 대안으로 꽃 재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태안에서 매년 꽃박람회가 열리는데 큰 형님이 태안에 꽃을 퍼뜨린 장본인입니다.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주말이면 큰 형님 곁에서 꽃 재배 사업을 거들며 자랐답니다. 하지만 잘 나가던 꽃 재배 사업도 10년 정도 하니까 더 이상 버티기 힘들 정도로 어려워지더군요.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일손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1980년쯤부터 조금씩 수목원으로 가꿔 나가기 시작했죠.”
본격적으로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신 원장이 대학에 다니던 시절이다. 대학에서 임학을 전공한 그는 광릉수목원에 견학을 갔는데 웅장한 고목들이 가득한 숲을 보고 그만 흠뻑 매료되고 말았다. 영감을 받은 신 원장은 그 길로 큰 형에게 달려가 꽃 대신 나무를 심어서 수목원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집안의 야산에 커다란 해송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주로 땔감으로 쓰던 시절이었어요. 나무가 그렇게 크게 자라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이 때문에 수목원은 보통 세월싸움이라고 얘기해요. 엄청난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죠. 문제는 자본이에요. 어디서 돈이 나와야 나무를 심는 투자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고안한 것이 묘목 사업이랍니다. 지금 수목원 자리에 나무를 심으면서 한쪽에선 판매용 묘목을 심기 시작했죠. 한약재로 쓰이는 두충나무부터 메타세쿼이아 등 다양한 나무를 심었어요. 현재 태안 일대 홍가시나무는 거의 청산수목원에서 키운 것들입니다. 이렇게 나무를 팔아서 나무를 심는 과정을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펼쳤고 40년이 넘으면서 지금의 울창한 나무로 자라게 된 거죠”
◆꽃과 나무를 사랑한 형제의 열정
청산수목원에 들어서면 방대한 규모의 수련정원에 깜짝 놀라게 된다. 2001년쯤 중국에서 연꽃 120종을 구입해 논에다 심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2002년 안면도국제꽃박람회가 열리면서 큰 시너지를 냈다.
“큰 형님은 농사를 지었지만 인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답니다. 중학생 시절 학교까지 왕복 20km를 걸어 다녔어요. 오일장이 열릴 때마다 책을 빌려서 읽었는데 중학생 때 이미 책 500권을 독파할 정도로 예술, 역사 등 다양한 책을 방대하게 섭렵했답니다. 그런 큰 형님이 다양한 스토리에 등장하는 연꽃에 반한 것 같아요. 2001년만 해도 수목원은 허허벌판이었어요. 논에 연을 심었는데 연꽃이 피는 시기는 휴가철인 7~8월입니다. 피서객들이 태안의 해수욕장에 놀러왔다가 수목원의 연꽃을 보러 엄청 많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아예 매년 여름에 연꽃축제를 시작했죠. 연꽃이 점점 늘면서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연꽃 종류를 보유한 수목원이 됐답니다. 수목원에는 삼족오 미로공원, 밀레정원, 고갱가든, 모네의 연원, 만의 길 등이 조성됐는데 대부분 큰 형님의 인문학적 소양에서 탄생한 이름들입니다.”
1980년대부터 심기 시작한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자 2016년 나무 정원도 개방하면서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지금의 수목원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의 말대로 보통의 인내심으로는 꿈도 꾸지 못하는 세월싸움이다. 수목원의 기초를 닦은 열 살 터울 맏형 신세철 원장은 안타깝게도 2019년 겨울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남면 면장을 지내던 신형철 원장이 2022년 하반기에 조기 퇴직한 뒤 바통을 이어받아 수목원을 가꿔 나가고 있다. 정식 원장을 맡은 지는 이때이지만 큰 형이 연로하면서 일선으로 물러난 2013년부터 신 원장이 수목원을 본격적으로 챙기기 시작했다. “일꾼들을 구하기 너무 어려웠어요. 할 수 없이 중고 포클레인을 구입해 출근하기 전 새벽에 제가 흰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직접 길을 내며 수목원을 디자인했답니다.”
◆국내 최대 팜파스 정원을 만들다
청산수목원은 한겨울 3개월여를 제외하고는 다양한 축제가 끊이지 않고 펼쳐지는데 그가 태안군청 농정과에서 5~6년 축제 관련 업무를 도맡은 것이 큰 도움이 됐다. 태안 육종마늘 축제, 백합축제, 캠핑축제 등이 그의 작품이다. 작고한 송해 선생이 진행하던 유명 방송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도 태안에 세 차례나 유치했다. 또 태안군 문화관광과에서 마케팅팀장으로 7년 넘게 일하면서 다양한 공중파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태안을 알렸고, 블로그 등 사회관계망서비스 마케팅에도 눈을 떴다. 팜파스그라스축제도 이때 탄생했다.
“2010년 고남면을 지나는데 팜파스그라스가 핀 풍경이 참 예쁘더군요. 그때 무릎을 탁 쳤죠. 잘하면 그림이 될 것 같았어요. 이에 인근 천리포수목원 부원장의 도움으로 팜파스그라스를 보유한 농장에서 10주를 100만원에서 산 뒤 4등분해서 40주를 수목원에 심었습니다. 2016년쯤 되니까 제법 울창해졌고 그때 사진 몇 장을 페이스북에 올렸어요. 그걸 보고 무려 3만2000명이나 수목원을 찾았답니다. 이에 전국을 뒤져 국내에 있는 팜파스그라스 100주가량을 모두 사다 심었고, 시간이 지나 팜파스그라스가 번식해 울창하게 자라면서 전국 최대 규모의 팜파스그라스 정원이 됐답니다. 은색의 팜파스그라스 앞에 핑크뮬리를 심으면 그림이 더 좋을 것 같아서 2017년 핑크뮬리 정원도 조성했습니다. 덕분에 가을이면 두 정원이 어우러져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예쁜 정원으로 변신한답니다.”
팜파스그라스는 바람에 아주 약해 태풍이 불면 모두 쓰러지고 영하 6도 밑으로 기온이 떨어지면 얼어 죽기 때문에 관리하기 매우 까다로운 식물이다. 따라서 겨울에는 몸통을 볏짚 등으로 감싸는 보온이 필수다. 다행히 청산수목원의 높고 빽빽한 홍가시나무들이 팜파스그라스 정원을 병풍처럼 에워싸 바람을 막아 주기에 자연스러운 형태의 팜파스그라스 자태가 그대로 잘 유지되고 추위도 잘 견딘다.
홍가시나무를 심은 것은 이처럼 ‘신의 한수’였다. 사철나무인 홍가시나무는 4월 중순쯤 잎이 올라오기 시작하는데 신기하게도 불타는 빨간색이다. ‘봄의 단풍’으로 불리는 이유다. 재미있는 것은 잎을 잘라주면 새 잎도 빨간색으로 올라와 마음만 먹으면 일년 내내 빨간 잎을 볼 수 있다. 봄에 첫 잎이 나올 때가 가장 색이 짙어 4~5월 홍가시나무 정원은 웨딩화보 촬영 장소로 인기가 높다.
신 원장은 수목원을 꾸밀 때 미래를 내다보는 상상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집을 지을 때 설계를 잘 해야 되는 것처럼 수목원도 식물이 컸을 때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상상력을 발휘해서 처음부터 터를 잘 잡는 것이 아주 중요해요. 그래야 나중에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답니다. 한 번 옮기면 다시 자리 잡기까지 3~4년은 그냥 허비된답니다.”
신 원장은 썰렁한 겨울철을 견디기 위해 내년에는 홍매화축제에 도전한다. “북부지방은 겨울에 얼음축제를 할 수 있지만 이곳은 겨울에 별로 볼 게 없어요. 그래서 홍매화를 130주 정도 심었어요. 3월10일쯤부터 꽃눈이 피기 시작하니까 내년에는 봄 축제를 한 달 정도 앞당길 수 있을 것 같네요. 또 100평 넘는 면적에 수선화도 심었는데 3월20일쯤 필 것으로 예상합니다. 여기에 화사한 진분홍으로 피는 박태기나무도 많이 심었답니다. 내년 봄에 더 예뻐질 수목원을 상상하니 벌써 가슴이 설레네요. 많이 기대해 주세요.”
신형철 청산수목원 원장은…
●1965년 충남 태안 출생 ●서산농림고-건국대학교 임학과 졸업 ●태안군 농정과 ●태안군 문화관광과 마케팅팀장 ●태안군 남면 면장 ●청산수목원 원장(2022년) ●농업발전유공 농림부장관 표창(2001년) ●지역축제 건전육성 기여 충남도지사 표창(2014년) ●관광산업발전 문화체육부장관 표창(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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