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은 있되 편견은 빼고 평가
정해진 입맛 따라야 생존하는
한국 사회 전반에 교훈 던져줘
“에? 이게 뭐여? 오옹?(백종원)” SNS를 강타하며 온갖 패러디를 창발 중인, 아마도 올해의 밈(meme)으로 기억될,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의 한 장면이다. 흑수저 요리사 80명이 백수저로 지칭된 스타셰프 20인에게 도전하는 구도를 내세운 ‘흑백요리사’는 부제에서부터 대놓고 계급을 화두로 던진 프로그램. 초반엔 의문이 들었다. 계급 안에서 정당한 경쟁이라는 게 가능할까? 가뜩이나 ‘공정’이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이 된 시대. 제작진에게 공정성 확보는 프로그램 생존을 위한 미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게 뭐여?”를 탄생시킨 2차전 블라인드 테스트가 이때 치트키로 차려졌다. 공정을 위해 제작진은 백종원 안성재 두 심사위원의 눈을 안대로 가려 버렸다. 플레이팅만 봐도 누구의 요리인지 짐작할 수 있으니, 편견이 끼어들 여지를 애초에 차단해 버리자는 발상이었다. 제작진은 운도 좋지. 예기치 않게 슬랩스틱을 연출한 심사위원들의 온몸 아끼지 않은 리액션은 ‘흑백요리사’가 시청자를 유입하는 데 지대한 힘을 발휘했다. 참가자를 평가하는 블라인드 테스트는 역설적으로 심사위원의 역량을 시청자가 평가·검증하는 무대로도 기능했다. 보지 않고도 요리 재료 등을 잡아채는 모습 등을 통해 두 심사위원은 권위를 확보했다. 초반 확보된 이러한 권위가 추후 이어진 대결에 무게를 더했음은 물론이다.
백종원 안성재가 완전 다른 종류의 셰프임을 천명한 것도 이 미션에서였다. 그들은 의견 차를 두고 여러 번 팽팽하게 맞섰는데, 자칫 요리에 대한 신빙성을 떨어뜨릴 수 있었던 이러한 극과 극 심사평에 시청자들이 납득될 수 있었던 건, 그들에게 경험에서 쌓아 올린 각자의 확고한 평가 기준이 있어서였다. 기준은 있되 편견은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특히 음식에 담긴 의도를 집요하게 물으며 요리사가 표현하고자 한 메시지까지 읽어내려 한 안성재의 평가에서는, 자신의 미각이 절대적인 건 아니라는 심사위원으로서의 ‘자기 의심’이 곁들어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잘하는 것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해 보지 않은 것들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도전자들의 면면이 합세했다. 이때부터 이 프로그램은, 승패 너머의 지점으로 도약했다. 이겼다는 것이 꼭 지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 반드시 졌다는 걸 의미하지도 않는다는 걸 보여줘서다. 나는 이 프로그램의 진짜 성과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청자가 결과보다 과정을 즐길 수 있었던 이유도.
다시 ‘평가’에 대해 생각해 본다. 평가는 평가하는 사람을 보여주곤 하지만, 그 사회를 드러내기도 한다. 최근 한 유튜브 채널에 ‘세계 톱 클래스 바이올리니스트가 한국 입시생으로 위장해 몰래 연주했을 때 교수님들 반응’이라는 이름의 영상이 올라왔다. 여기서 톱 바이올리니스트는 개성 강한 연주로 유명한 레이 첸. 그가 한국 입시생으로 위장, 대학교수 3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에게 블라인드 테스트를 받은 것이다. 속임수를 위해 첫 번째 연주를 일부러 망친 레이 첸은 두 번째부터 슬슬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날아든 건 연이은 혹평이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평가는 다음과 같다. “입시라는 게 보편적인 기준에서 평가받는 것이기 때문에…(중략) 크면서는 좀 더 개성 있는 연주가 중요할 수 있겠지만, 입시 때는 많은 선생님 입맛에 맞는 연주를 하는 것도 좀 필요하다고 봐요.”
해당 영상은 ‘흑백요리사’와 (다른 의미를 지닌) 같은 결론으로 수렴된다. 우리나라 입시에선 합격했다는 것이 꼭 우수한 걸 의미하진 않는다는 걸. 불합격이 반드시 능력 없음을 뜻하진 않는다는 걸. ‘흑백요리사’가 드문 예일 뿐, 현실에서의 대다수 평가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음악이든 산업이든 과학이든 잠재력을 발휘하기보다, 정해진 입맛에 따르는 게 ‘생존하셨습니다’ 소릴 듣는 데 더 유리하니까. 그러고 보니, 아시아 여성 문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한강은 2016년 박근혜정부 시절 문화를 담당하는 이들 입맛에는 블랙리스트였다.
정시우 대중문화 칼럼니스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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