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헌법 가운데 헌법 택해
지금 헌정 위기 막을 지도자 없어
헌법·양심의 헌재 판결 책임 커져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인 2022년 2월 마이크 펜스 전 미국 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기도부터 하자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펜스 전 부통령을 배려한 제안이었다. 당시 펜스는 천주평화연합(UPF) 주최로 열린 ‘2022 한반도 평화 서밋’ 참석차 방한했다. “나는 공화당원이기 이전에 보수주의자이며, 보수주의자이기 이전에 기독교인이다.” 자신의 신조대로 펜스는 기독교적 신념, 보수주의 가치를 정파적 이해보다 앞세웠다.
2021년 1월6일 미 의사당 폭동 현장에서의 처신이 대표적 사례다.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대선 결과를 뒤집기 위해 의회 인증절차를 보이콧하라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시에 불응하고 펜스는 바이든 당선 절차를 마무리 지었다. 트럼프 선동 메시지에 의사당을 습격한 폭도들은 “펜스를 죽여라”(hang Mike Pence)를 외쳤다. 지난해 미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도전했던 펜스는 연설에서 “그날 트럼프는 대통령과 헌법 중에 선택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헌법을 택했고, 언제나 그럴 것”이라고 했다.
현지 학자들은 펜스가 트럼프 요구를 따랐더라도 헌법상 대선 결과가 뒤집히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날 헌법을 지킨 단 한 사람 덕분에 미 의회와 법원이 치열한 법적 투쟁에 나서지 않아도 됐고, 민주주의 추락으로 미국민이 겪어야 할 혼란과 분열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민주당 의원들도 그날만큼은 헌정 질서가 무너지는 사태를 막은 펜스의 결단에 박수를 보냈다.
전 세계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빠진 대한민국을 지켜보고 있다. 지난 주말 대통령 관저 주변에선 체포 영장을 집행하려는 수사 당국과 이를 막는 경호처 대치, 찬반 세력의 장외 집회가 실시간 중계됐다. 군대를 동원하고 헌법기관을 겁박한 비상계엄 사태로 ‘내란 수괴’ 혐의를 받는 윤 대통령이 자초한 일이다. 지도자 오판과 망상이 어떻게 국가 위상을 한순간에 곤두박질치게 하고 국민을 분열시키는지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더욱 절망스러운 건 붕괴 직전 법치의 둑을 막겠다는 ‘단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헌법의 가치, 헌정 질서와 법치주의는 보수주의의 근간이라고 믿는다. 헌법 수호를 선서한 대통령이 경호 인력과 극성 지지층을 방패 삼아 수사에 불응하고 “끝까지 싸우겠다” “반드시 승리한다” 같은 길거리 시위 주동자가 쓸 법한 메시지를 내놓을 줄은 몰랐다. 훼손된 헌정을 바로잡아야 할 국민의힘 지도부는 대통령과 헌법 중 대통령을 택했다.
대법원 유죄 확정 판결에도 “역사와 양심의 법정에선 무죄”라는 식의 궤변은 좌파의 ‘무치’(無恥)로 치부했더랬다. 지금 용산과 여당 지도부 행태를 보면 수사 당국이 어떤 결과를 내놓아도, 사법부가 어떤 판단을 해도 이를 수긍할까 싶다. ‘권한대행의 대행체제’까지 만들며 조기 대선에 급급한 거대 야당의 무책임이 법치 후퇴의 명분이 될 수는 없다.
여당 인사들 말처럼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 심리를 졸속으로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거야의 정치적 셈법이나 광장의 찬반 압력이 변수가 될 수 없다. 헌법을 구할 단 한 명의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헌재만이, 헌법만이 소용돌이에 빠진 우리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종석 전 헌재소장은 지난해 10월 퇴임하면서 “사법의 정치화를 경계하고 재판의 독립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툭하면 권한쟁의심판, 탄핵심판을 제기하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사법의 정치화로 나타날 우려를 지적한 것이다.
헌재 재판관 8명을 누가 추천했느냐에 따라 정파적 판결이 나올 것이라는 예단은 정치권 진영 논리다. 재판관들은 헌법 제103조에 따라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할 의무를 질 뿐이다. 윤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 방한 때 선물받은 명패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를 각별히 아꼈던 것 같다. 늘 용산 집무실 책상에 놓아둔 그 명패는 유명무실해졌다. 이제 헌재가 모든 책임의 무게를 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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