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설 연휴 마지막 날인 2월10일. 국보 1호 숭례문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숭례문을 전소시킨 70대 남성은 토지보상에 대한 불만으로 국보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
시뻘겋게 타오르다 잔해로 변한 숭례문을 지켜보던 국민들은 슬픔과 절망에 휩싸였다. 이후 5년 3개월간 복구작업을 거쳐 2013년 5월 4일 국민 품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국민적 트라우마로 남았다.

방화범은 10일 오후 8시 45분쯤 숭례문 2층 누각에 올라가 1.5ℓ 페트병에 준비해온 시너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2년 전에도 창경궁 문정전에도 불을 지른 그 방화범이었다.
숭례문 누각 2층 지붕에서 흰 연기와 함께 빨간 불길이 솟아올랐다. 화재 초기 쉽게 잡힐 것 같던 불길은 5시간 넘게 계속됐다.
자정을 넘겨 0시 25분쯤 2층 누각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고, 30여분 뒤 지붕 뒷면이 붕괴하기 시작해 1시 5분 2층 지붕 3분의 1가량이 무너졌다. 불이 완전히 꺼진 새벽 1시 55분엔 누각을 받치고 있던 석반만 남긴 채 지붕을 포함한 목조건축물 2층은 완전히 붕괴된 상태가 되고 말았다.
당시 숭례문을 관리하고 있던 업체 직원은 퇴근한 시간이었다. 숭례문 화재 최초 신고자는 주변 도로를 지나던 택시기사였다. 그는 오후 8시 50분쯤 숭례문에서 연기가 솟구치는 장면을 목격하고 곧바로 119에 신고했다.
신고 3분 뒤인 8시 53분쯤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회현 119안전센터 대원들이 도착해 불길을 잡기 시작했다. 4분 뒤인 8시 57분쯤엔 중부소방서 대원들이 숭례문에 도착했다. 이날 화재 진압에 동원된 인력만 소방관 128명, 소방차 32대가 동원돼 진화 작업을 벌였다.
피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5시간 이상 지속된 화재로 2층 문루의 90%, 1층 문루의 10%가 각각 소실됐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흥인지문이 소실됐을 때도, 한국전쟁 때도 살아남았던 숭례문이 허무하게 무너진 순간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오용규 중구소방서 진압 팀장은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를 통해 “33년 소방관 생활 중 가장 큰 사건이다”면서 “무전으로 화재 현장을 물으니 남대문이라고 하더라. 남대문 시장에서 불이 난 줄만 알았다”고 말했다. 이어 “현장에 도착 후엔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숭례문에 불이 날 수 있어? 이런 심정이었다”고 전했다.
화재 원인 파악을 위해 온 문화재청 관계자들은 범행에 사용된 도구들 발견했고 방화 사건을 확신했다. 2층 누각 세 번째 기둥 바닥에 뿌린 시너에 불이 붙고 순식간에 불이 천장에 닿을 만큼 커져 화염이 기둥과 천장까지 옮겨붙었던 것이다.

방화범은 화재가 발생한 지 23시간 만인 2월 11일 오후 7시 40분쯤 인천 강화군의 전처 집에서 검거됐다. 자신이 소유한 토지가 신축 아파트 건축 부지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받게 된 토지 보상액에 불만을 품고 범행을 벌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후 덤덤하게 현장 검증을 재현해 또 한 번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홧김에 숭례문에 방화를 저질렀던 방화범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후 2018년 만기 출소했다. 숭례문은 혈세 225억원이 투입된 5년 3개월의 복원 작업 끝에 2013년 5월 다시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한양도성 정문 역할을 했던 숭례문은 조선왕조가 한양 천도 후인 1395년(태조 4년)에 도성 남쪽 목멱산(남산)의 성곽과 만나는 곳에 짓기 시작해 1398년 완성했고 이후 600여 년간 몇 차례 보수를 거쳤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양 끝으로 이어지던 성곽이 허물어지며 문의 역할을 마감했다.
정부는 숭례문 화재를 계기로 매년 2월 10일을 문화재 방재의 날로 지정했다. 국가유산청은 이날을 전후해 해마다 국가유산 현장에서 방재 대응 상황을 점검하고 재난대응 훈련을 하고 있다.
국가유산청은 10일 ‘국가유산 방재의 날’을 맞아 서울 숭례문과 경복궁·창덕궁·덕수궁·창경궁 등 4대 궁의 야간 조명을 밝힌다. 야간 조명은 이날 오후 6시부터 11일 오전 8시까지 불을 밝힐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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