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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윤의어느날] 나를 모르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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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3-25 23:32:54 수정 : 2025-03-25 23: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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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방이었다. 나는 각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낯선 이와 마주 앉아 있었다. 둥근 얼굴형과 둥근 눈, 안경테까지 모두 둥근 사람이라 이곳에는 동그라미와 네모가 있구나, 생각했다.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세모는 나의 역할인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곳은 상담클리닉이었고 상담을 신청한 이는 다름 아닌 나였기 때문이다.

지난겨울부터 계속된 폭식과 무기력으로 나는 우울한 상태였다. 12월은 힘들었고 새로운 1월은 전혀 설레지 않았으며 2월은 끔찍했다. 뭐가 문제인지조차 모르겠는 시간들이 연이어 흘렀다. 문제는 그 시간들이 자꾸 나를 빠뜨린 채 가버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홀로 멈춰 작고 성긴 조개껍데기 같은 것이 된 기분이었고, 어느 날 커다란 발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 모래알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상담을 통해 그 ‘커다란 발’이 무엇인지 알아볼 작정이었다. 누가 나를 밟았지, 누가 나를 모래알로 만들었지, 원망 섞인 마음이 자꾸 치솟아 나는 줄곧 심호흡을 했다.

“지난해에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낯선 이가 물었다. 겨울부터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나는 빈 깡통처럼 살았다고, 하는 일이라곤 오로지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일뿐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적어도 겨울이 되기 전까지 나는 부지런히 살았으니까. 나는 돈을 벌기 위해 했던 일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했던 일, 그간 책임져야 했던 일들에 대해 말했다. 곰곰이 듣고 있던 이가 말을 건넸다. “많이 힘드셨겠어요.” “제가요?” “그럼요. 그렇게 많은 일을 전부 신경 쓰려면 힘이 들죠.” 아니요, 아닌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 별로 힘들다고 생각 안 했는데요. 남들도 그 정도는 다 하고 살지 않나요?”

나는 정말 힘든 사람들에 대해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다. 고독한 농성자와 자영업자, 생존하기 위해 매 순간 필사적인 사람과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가치를 지키려 자신의 소중한 것을 제일 먼저 내던지는 사람. 그런 사람들 안에서 나는 고작 오늘을 살기 위해 종종대는 정도였다. 그런 주제에 힘들다고 말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것 아닐까.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 뭐라도 해볼 수 있어요.” 낯선 이가 부드럽게 타이르는 말에 위로받아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다들 이 정도 부침과 불안 정도는 갖고 살지 않나. 그럼에도 나는 낯선 이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자그마한 방 안에 물방울 떨어지듯 시간이 고이고 있었다. 적어도 그 공간에서는 나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었다. 그곳은 나를 위한, 나 자신을 알기 위한 장소였으니 말이다. 테이블 위 탁상시계가 내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째깍째깍 움직였다.

“저는 힘든가요?” 낯설고 둥근 이를 마주 보고 나는 물었다. “우울하거나 이상한 게 아니라 저는 지금 힘든 건가요?” 망가졌거나 쓸모없어진 게 아니라 다만 지친 건가요. 힘든 일들을 지나면 다시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런 걸 전부 묻진 못하고 나는 중얼중얼 ‘저는 힘든 사람인가요’만 거듭 물었다. 그것은 결코 나를 모르는, 낯설고 다정한 이에게만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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