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넘는 참화의 끝에 선 우크라
제 나라의 운명도 직접 결정 못해
약소국의 냉엄한 현실 남의 일일까
6·25전쟁 당시 평안남도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이어지는 10여㎞의 좁은 계곡길을 훗날 미군들은 ‘시련의 길’이라고 불렀다. 앞서 북쪽 지역 운산에서 중공군 기습으로 군우리로 밀려온 미 보병 2사단은 1950년 11월30일 남쪽으로 향하는 계곡을 따라 후퇴했지만, 계곡 양편에서 매복 중이던 중공군의 공격으로 수천명의 사상자를 냈다. 마지막으로 퇴각했던 제2공병대대는 특히 피해가 컸는데, 그날 하루에만 장병 900여명 중 500명 이상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미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저서인 ‘콜디스트 윈터’에서 생존 장병들을 심층 인터뷰해 당시 전황을 재현하고 “미군 사단 하나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고 했다.

시련의 길과 겹쳐 보이는 우크라이나 전선이 있다. 서방 언론은 러시아 쿠르스크의 중심지인 수드라에서 우크라이나 국경을 잇는 R200 고속도로 곳곳에는 퇴각하는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시신이 널려 있다고 전하면서 ‘죽음의 도로’라고 칭했다. 퇴각하는 우크라이나군을 노리는 러시아 드론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고 활공하는 독수리를 연상시킨다. 쿠르스크는 지난해 8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국경을 넘어 기습적으로 점령한 러시아 본토 지역이지만, 러시아의 반격이 거세지면서 전황이 불리해지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3년을 넘겼다. 지난달 24일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전쟁이 발발한 지 만 3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전쟁은 많은 측면에서 75년 전 6·25를 닮았다. 죽음의 도로에서 시련의 길을 본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5년 뒤 발발했던 6·25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진영 간 최초 전쟁이다. 냉전을 가속화하면서 진영 간 갈등이 언제든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1990년대 소련 해체와 냉전 종식 후 평화를 구가하던 서방 진영에게 러시아의 군사적인 위협의 실체를 직시하게 했다. 더구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취임으로 미국 없는 홀로서기를 고심하는 유럽으로서는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그동안 우크라이나가 입은 피해도 어마어마하다. 전 국토가 전쟁의 포화에 쑥대밭이 됐고, 전체 국토의 약 25%를 러시아에 뺏겼다. 이대로 종전이 되면 실지 회복은 요원하다. 인명 피해도 크다. 전사자만 10만명을 넘었고, 1000만명의 우크라이나인이 고향을 떠났고, 이 중 700만명이 유럽 각지로 피란길에 올랐다. 우리나라에도 1000여명의 우크라이나인이 광주 고려인 마을에 정착했다.
무엇보다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약소국의 처지가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을 또다시 일깨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직접 소통하면서 종전 협상을 밀어붙이고 있다. 3년 전쟁이 마무리될 가능성은 커졌지만, 미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휴전협상에서 우크라이나는 배제되고 있다.
기대를 걸었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과의 워싱턴 정상회담은 어떠한 합의도 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끝났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무례하다”, “고마운 줄 모른다”는 등의 독설을 들으며 모욕당했지만, 유럽 정상들은 오히려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트럼프 대통령과의 화해를 압박했다고 한다.
우리도 6·25전쟁 정전협정 당시 우리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던 과거가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특히 우리 안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소홀히 볼 수 없다. 북한 참전은 물론 북·러 군사동맹은 한반도 정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이 우리 안보의 중요한 축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미국의 달라진 외교도 우리에게는 위험 요인이 된다.
‘보트피플’이라는 말을 처음 접한 것은 40여년 전인 초등학교 수업시간에서다. 시대가 변했다. 지금은 보트피플을 말하면 시대착오적이고 고리타분하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1000만 난민이 이 시대의 보트피플이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국가의 국민은 언제든지 전쟁과 죽음의 위기에 내몰릴 수 있다.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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