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휠체어를 타는 딸과 왕십리역에 갔다. 왕십리역은 무려 4개의 노선이 교차하는 복잡하고 큰 역이다. 5호선에서 2호선으로 환승하려는데 갑자기 계단이 나타났다. 낭패감이 들었지만 이미 충분히 헤맸던 터라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이를 안고 계단 밑에 앉힌 후 다시 뛰어 올라가 휠체어를 들고 내려왔다.
안내 문구는 보행자 위주로 붙어 있었다. 이 이야기를 나중에 하니 누군가가 “어, 다른 쪽에 경사로가 있는데”라고 말했다. 그때 알게 됐다. 휠체어 이용자들이 보행자 위주로 된 안내표지를 믿는 대신 차라리 다른 휠체어 이용자들의 이용 후기를 더 신뢰하는 이유를.

초창기 지하철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이동권 의식이 높아지고 장애 당사자들의 끈질긴 요구로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하나둘씩 생겨났다. 그러나 애초에 엘리베이터를 염두에 둔 설계가 아니었기에 휠체어 이용자들은 환승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 역에서는 개찰구를 지나야 환승 승강기가 나오고, 어느 역에서는 심지어 역 바깥으로 나가야만 환승이 가능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며 크라우드펀딩을 시작한 게 2015년이다. 휠체어 환승길 바닥에 스티커를 붙이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반 시민이 지하철에 스티커를 붙이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무의라는 조직을 만들어 ‘서울지하철교통약자환승지도’를 만들었다. 대학생, 직장인, 시니어 등 200여명의 시민이 힘을 보탰다. 지도를 보며 “30년 만에 처음 휠체어로 출퇴근할 용기를 냈다”는 휠체어 이용 청년의 문자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도는 내 최종 목적이 아니었다. 지하철에서 지도를 보고 다녀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안내표지가 잘 만들어져 있다면 무의 지도는 ‘무의미’해질 터였다.
현장에는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역무원들이 유아차나 휠체어로 환승하는 길을 컬러 프린터로 출력해 붙이는 역이 늘어났다. 환승 때 개찰구를 통과해야 하면 “휠체어나 유모차 소지 고객은 벨을 눌러주시면 문을 열어드립니다”란 안내문도 등장했다. 2022년에는 서울교통공사가 어르신들이 발을 자주 헛디뎌 사고가 많은 에스컬레이터 대신 승강기로 유도하는 바닥띠 스티커를 9개 역에 도입하기도 했다. 여러 사정상 더 확대할 수는 없었지만 7년 전의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공사 직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졌다.
왕십리역 계단에서 아이를 안고 내려온 지 어느덧 10년. 그때의 꿈이 이뤄졌다. 올 4월 무의는 서울시, 서울교통공사, 현대로템과 함께 ‘모두의 지하철을 위한 안내표지 개선사업’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교통공사가 운영하는 환승 구간의 교통약자 안내표지를 연구하고 부착하는 사업이다.
중요하지만 사업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쉬운 공공디자인 사업이 민관협력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도 뜻깊다. 제안서를 쓰면서 비슷한 해외 사례를 알게 됐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 소재가 된 일본의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다. 공중화장실 사용경험 개선을 위해 민간기업(패스트 리테일링)과 시부야구, 일본재단이 협력해 건축가들이 화장실 17개를 만들어 공중화장실 만족도를 90%로 높인 프로젝트다.
‘모두의 지하철’이 영화화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내 딸과 같은 휠체어 이용자들이 더 쉽게 지하철을 탈 수 있게 되면서 자유가 확장될 수 있다면 10년의 기다림은 보람이 될 것이다.
홍윤희 사단법인 무의 이사장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