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궁 대신 손님숙소 생활하며
노숙자 등 소외된 이들 먼저 챙겨
방한 때 세월호 유족 위로 큰의미
콘클라베서 탄생한 새로운 교황
실천하는 진리 이끌어 주시길
가톨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세상 가장 낮은 이들을 사랑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향년 88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다.

2013년 남반구 최초이자 아메리카 대륙 최초로 교황이 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는 교황이 되자마자 아프리카 난민이 몰려들던 지중해 람페두사섬을 방문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교황이 될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교황은 난민과 이주민,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의 친구로 살았다. 그는 교황 재임 동안에도 교황궁에 머물지 않고 손님들이 기거하는 산타 마르타 숙소에 거처하면서 검소하게 살았다. 바티칸 시국에는 ‘자비의 선물’이라는 쉼터를 마련해 노숙자들이 샤워하며 쉴 수 있도록 했고, 바티칸 시국 내에서 죽음을 맞은 노숙자들이 바티칸에 묻힐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를 유달리 사랑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아시아 국가 중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 위로하며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았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교황을 두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했지만, 교황은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
실제 프란치스코란 이름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남반구 출신 교황이라 ‘마르크스주의자 아니냐’고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있지만, 교황은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한다고 해서 무조건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자신의 신념을 분명히 밝혔다.
교회 내 보수 인사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걷는 노선을 싫어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내린 선택과 결단을 끝까지 고수함으로써 참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프란치스코가 마지막까지 붙들었던 판단 기준은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믿는 진리 앞에서 강단 있는 모습을 보이며 가톨릭 전체가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쇄신되기를 바랐다. 다만 교황은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다툼을 일으키는 것은 피하고자 했다.
교황의 모습은 편 가르기와 당파싸움에 익숙한 우리 사회에도 큰 울림이 된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올바른 것을 실천하라고 권고하는 교황. 민주주의라도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 잘못된 민주주의라고 가르치며, 소수의 사람이 외치는 목소리라도 옳은 일이면 그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외치던 교황. 우리가 겁먹어서는 안 되는 단어가 ‘연대감’이라며 삶은 혼자 갈 수 없는 길이니,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생각의 반경을 넓혀야 한다고 가르치던 교황. “더 이상 전쟁은 그만!”이라 외치던 교황. 이런 가르침을 전하는 분이 떠나고 나니 큰 어른 한 분이 사라진 기분이다.
따뜻한 미소로 겸손하게 살았던 프란치스코 교황, 탱고와 축구를 사랑했던 교황, 언제나 인간적인 면모를 지녔던 교황은 돌아가신 뒤 검소한 목관에 누워 교황청 밖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지하에 묻혔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낮추는 그분의 모습은 더 높은 자리, 더 부유한 것을 추구하는 우리네 인생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이제 곧 콘클라베가 열릴 것이다. 가톨릭 교회 추기경들이 모여 새로운 교황을 선출할 것이다. 과연 어떤 교황이 탄생할까? 프란치스코 교황을 이끌어 주던 하느님이 가톨릭 교회가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희망한다. 세상이 아무리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마지막 자서전 ‘희망’이 이야기하듯 우리에게 한 줄기 희망이 있다면 우리 모두 프란치스코 교황이 추구하던 진리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우리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고 외쳤다. 그 희망 안에서 우리 사회도 자기 목소리만 높이는 게 아닌 연대감 가득한 사회,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사회, 가난한 이들을 배척하지 않는 사회로 발전해 나갔으면 좋겠다.
염철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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