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심 교체 하세월 속 소비자 분통
고령층은 교체 예약도 쉽지 않아
미흡한 대응 속 정보유출 우려↑
탈SKT 급증… 하루 3만명 빠져
“이심 활용은 왜 안하나” 지적도
금융당국, 30일 비상대응회의
29일 오전 9시 서울 마포구의 한 SK텔레콤(SKT) 매장 앞. “익일 50개 유심(USIM) 입고 선착순”이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 아래로 30여명의 시민이 줄지어 섰다. 대부분 중장년층으로, 지팡이에 의지한 채 몸을 가누는 70대 노인도 보였다. 매장 문이 열리자 고객들 시선이 일제히 문 쪽을 향했고, 차 안에서 기다리던 서너 명도 다급히 내려 줄에 합류했다. 오픈 약 1시간 만에 직원이 나와 “고객님 죄송합니다. 금일 준비된 유심 재고가 모두 소진되었습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이자 한숨과 함께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로 앞에서 마감된 이상호(71)씨는 얼굴을 찌푸린 채 “어제도 왔다가 못 받고 갔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자녀 부부와 가족결합 상품을 쓴다는 이씨는 “아들이 유심 바꿔야 한다고 알려줬다”며 “내일은 더 일찍 와야겠다”고 발걸음을 돌렸다.

이씨처럼 디지털 사용이 익숙지 않은 노인의 경우 이번 ‘SKT 유심 해킹 사태’에 적절히 대응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날도 매장 바깥엔 ‘유심 무료 교체 예약 시스템’ 웹사이트 QR코드가 붙어 있었지만, 고령층들은 인식하는 방법을 몰랐다. 김성태(66)씨는 20여분간 휴대전화만 멀뚱멀뚱 쳐다 보다 ‘QR코드 인식하는 법’을 물어보더니 “QR코드는 자식들이랑 같이 있을 때나 해봤지 혼자 써본 적이 없다”며 “나보다 더 나이 먹은 사람들은 골치 아플 것 같다”고 토로했다. 유심 교체 전 휴대전화에 저장된 연락처나 공인인증서 등 데이터를 백업해야 하지만, 고령 고객들은 이런 사실도 알지 못했다. 대리점 직원들도 디지털 기기 사용법까지 하나하나 안내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의 ‘2023 디지털 정보격차 실태조사’에 따르면 70대 이상 고령층의 디지털 정보화 활용 수준은 100점 만점에 43.0점에 불과했고, 역량 수준도 36.9점에 그쳤다.
SKT 유심 교체에 하세월이 걸리는 데다 보안 불안감에 ‘탈SKT’를 택한 가입자도 늘고 있다. 유심 무상교체가 시작된 전날 3만4132명이 다른 통신사로 옮겨갔고, 이날 KT와 LG유플러스에 새로 가입한 사람은 각각 2만1343명, 1만4753명이었다. 알뜰폰 신규 가입자까지 더하면 SKT를 떠난 고객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적으로 유심 대란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가장 신속한 대책인 이심(eSIM·내장형 유심) 교체를 SKT가 적극 내세우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심보다 싸고 대리점 방문 없이 교체 가능한 이심 가입자가 늘면 ‘가입자당 평균매출’이 줄고, 오프라인 대리점 기반의 시장 지배력이 약화할 것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심 복제 우려가 커지자 국가정보원은 정부 전 부처에 공문을 통해 “SKT 유심을 사용하는 업무용 단말·기기를 대상으로 안전조치를 추진해 달라”고 요청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외교부 명의 업무용 휴대전화와 태블릿 등 모바일 단말기기에 대해 유심 일괄 교체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1차 교체를 완료했고, 나머지 2차 교체에 대해 일정을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SKT는 이번 사태로 직접적인 비용 지출은 물론 ‘1위 통신사업자’로서 신뢰 손상 등 유·무형의 손실을 보게 됐다. 신한투자증권 김아람 연구원은 “유심 교체만 가정했을 때 (SKT의) 직접적 재무 부담은 유심 개당 원가 약 4000원에 가입자 수 2500만명(통신 2309만명·알뜰폰 187만명) 및 수백억원대 과징금을 가정한 1000억∼2000억원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개인정보 탈취로 인한 금융사고에 대해 시민들의 우려가 가장 큰 만큼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30일 비상대응회의를 열고 유심 복제를 통한 부정 금융거래 등 2차 피해 우려와 관련한 대응책을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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