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가장 먼저 단행한 것은 군 장성 인사였다. 서울 방어를 책임지는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전투력이 뛰어난 특수 부대를 지휘하는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각각 임명됐다. 두 사람 모두 전두환의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생이자 사조직 ‘하나회’의 회원이었다. 오늘날 보안사는 방첩사로, 또 수경사는 수도방위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지난해 윤석열 전 대통령이 주도한 12·3 비상계엄 사태에 동원된 핵심 부대가 방첩사·수방사·특전사란 점, 이 세 부대 지휘관이 내란 중요 임무 종사 혐의로 모두 구속기소돼 재판을 받는 점 등을 감안하면 1979년이나 지금이나 한국군의 실세가 누구인지에는 변화가 없는 듯하다.

노태우는 12·12 당일 그가 이끌던 육군 9사단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진입함으로써 군사반란 성공에 혁혁한 기여를 했다. 훗날 전두환이 노태우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결국 그가 1988년 전두환 후임으로 대통령에 오를 수 있던 배경이다. 반면 정호용은 12·12 당시 대구에 주둔한 육군 50사단 사단장이어서 반란에 직접 가담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반란 성공 후 요직에 기용된 것을 보면 전두환과의 친분이 남달랐던 듯하다. 실제로 육사 11기 동기생 간의 관계에 정통한 이들에 따르면 정호용은 전두환이 제5공화국 대통령에 오른 뒤에도 사석에서 “두환아”라고 이름을 부를 만큼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정호용은 5공 시절 육군참모총장, 내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등을 지내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계엄령 하의 1980년 5월18일 광주광역시에서 전두환 신(新)군부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겨냥한 계엄군의 유혈 진압이 시작됐다. 올해로 45주년을 맞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다. 특전사 예하의 공수부대가 광주 시내에 투입돼 시민군과 대치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특전사령관이던 정호용은 광주에 여러 차례 가서 현장의 공수부대 지휘관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지시도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 인해 김영삼(YS)정부 시절인 1997년 대법원에서 징역 7년 확정 판결을 받았지만, YS가 임기 만료 직전 단행한 특별사면 조치로 풀려났다. 이후 정호용은 “나는 12·12는 물론 5·18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으나 신뢰가 가지 않는다.

국민의힘이 14일 정호용을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으로 위촉했다가 5시간 만에 취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루 지난 15일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 후보는 기자회견에서 “저와 상의한 바 없다”며 정호용의 선대위 고문 위촉을 “업무상 착오”로 규정했다. 정호용이 김 후보의 경북고 선배라고는 하나 1932년 9월 대구에서 태어나 현재 92세의 고령인 그가 선거운동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지 의문이다. 45년 전 광주 시민들 가슴에 피멍이 들게 만든 정호용의 이름이 느닷없이 소환된 것 자체가 패착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의힘이 6·3 대선을 앞두고 호남을 아예 포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대통령 파면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힘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는 절망감을 지우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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