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관된 계획으로 美 설득 성공
韓 중론 못 모으고 한계 드러내
日모델 삼아 대미협상 나서야
최근에 우리 정부가 일본 수준의 핵잠재력, 즉 미·일 원자력협정에 의해 일본이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 재처리에 관해 갖게 된 권한 정도를 미국과의 협의에 의해 보유하려는 정책을 추구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이달 초,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나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지난 8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일본 수준의 우라늄 농축 권한이나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권한을 가질 필요성을 제기했고, 이후 양국 간에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에 대해 큰 틀의 합의가 이루어지는 등 의미 있는 진전이 있었다고 소개하였다.
사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의 핵정책을 변경해서라도 핵억제 태세를 강화시켜야 한다는 논의들이 적극 제기된 바 있었다. 2015년 개정된 한·미 원자력협정을 재개정하여 일본 수준의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일본식 핵잠재력 강화론도 그러한 논의 가운데 하나였다. 다만 이전 정부는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속에서 한·미 간 확장억제 태세 강화로 대응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고, 한·미 간 핵협의그룹(NCG) 창설 같은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재명정부는 기존에 제기된 핵정책 담론 가운데 일본식 핵잠재력 강화 방안을 적극 수용하면서, 이를 한·미 정상 간의 의제로까지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학계 전문가들 사이에 논의되던 방안들에 대해 신정부가 주목하면서 정책 어젠다의 하나로 적극 반영하려는 점에 대해서 환영한다. 다만 일본이 1988년에 미·일 원자력협정 체결을 통해 현재 수준의 핵잠재력을 갖게 된 반면, 한국이 2015년의 한·미 협정을 통해서도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 재처리에 대해 미국의 사전동의를 필요로 하는 등 제약을 받게 된 역사적 경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음에도 일본 정치인들이 1950년대 이후 여야를 막론하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가적 기반을 구축하자는 목표에 있어서 초당적 합의를 이룬 점을 들 수 있다.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유엔 총회 연설을 통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제안한 직후, 나카소네 야스히로 의원을 포함한 일본 정치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원자력 관련 국제회의에도 공동으로 참가하면서, 이러한 견식을 바탕으로 원자력기본법, 원자력연구소법, 원자력위원회 설치법 등을 공동으로 발의하면서 원자력 이용에 관한 국내 기반을 정비하는 데 힘을 모았다. 우리 정치인들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원자력발전소 건설 등에 대해서는 국제적인 시야를 가지면서 초당적 합의를 이룩할 필요가 있다.
둘째, 1956년 일본 원자력위원회에서 원자력개발 장기기본계획을 책정할 때, 정부 관료뿐 아니라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였던 유가와 히데키 교수 등이 참가하여,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 플루토늄 이용, 고속증식로의 개발 등 핵연료 사이클 확립을 목표로 정립하였고, 이 같은 원자력 정책은 현재에도 일관되게 준수되고 있다. 한국도 1971년 당시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을 중심으로 같은 내용의 원자력발전 15년 계획이 수립된 바 있으나 1991년 한반도 비핵화 방침에 따라 농축 및 재처리 권한을 포기한다고 선언하는 등 정치적 여건에 따라 원자력 장기계획이 수시로 변경된 바 있다.
셋째, 1977년 미국 카터 행정부가 일본에 대해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를 위한 해외 수송 허가를 불허했을 때, 일본은 당시 후쿠다 총리를 비롯해 정부, 경제계, 학계가 일치단결하여 대미 외교를 펼치면서, 일본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일관되게 추구해 왔다는 점, 그리고 에너지 확보를 위해서도 원자력이 절대 필요하다는 논점 등을 제기하면서, 오히려 재처리에 대한 권한을 확보하였다. 이 같은 관민 일체의 협상 성과가 1988년 미·일 원자력협정 개정에도 이어졌다. 이에 비해 한국의 경우 2015년 대미 협상 과정에서 다양한 관계기관의 중론을 반영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협상력의 한계를 보였다는 지적이 있다.
한국은 이미 원자력발전 분야에서 세계 5위 수준의 강국이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인공지능(AI) 강국 구현을 위해서도 원자력발전을 통한 전력 확보는 그 기반으로서 절대 필요하다. 이 같은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일본이 핵잠재력을 갖게 된 조건들을 살피면서 초당파적인 태세 속에 대미 원자력 협상이 추진되기를 기대한다.
박영준 국방대학교 국가안보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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