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설왕설래] ‘플래그 재킹’

관련이슈 설왕설래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25-09-22 22:55:58 수정 : 2025-09-22 22:55:56
조남규 논설위원

인쇄 메일 url 공유 - +

영국의 탐험가이자 언어학자였던 리처드 버턴 경은 1853년 무슬림 순례자로 위장하고 이슬람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디나와 메카 순례에 나섰다. 순례에 나서기 전 무슬림 사회의 언어와 관습 등을 철저히 준비했다. 당시 무슬림이 아닌 서양인의 성지 방문은 법적으로나 관습적으로 금기된 일이었고, 발각되면 살해당할 위험이 컸다. 메카와 메디나를 서양 세계에 알린 그의 역작 ‘메카 순례 기록’은 목숨을 건 도박의 산물이었다. 버턴 경처럼 19세기의 유럽 탐험가들에게 국적 속이기는 생사의 문제였다.

20세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정치적·종교적 박해를 피하기 위한 국적·인종 세탁이 곳곳에서 이뤄졌다. 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은 나치의 학살을 피하기 위해 가짜 신분증을 이용해 가톨릭교도나 서유럽 국적자로 변신했다. 연합군 첩보원들은 독일 점령지에서 중립국인 스위스나 스웨덴 국적자로 암약했다. 이스라엘의 첩보조직인 모사드 요원들은 중동 지역에서 관광객이나 사업가로 행세하면서 작전을 수행한다.

중국이나 제3국으로 탈출한 탈북민들은 현지인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중국 조선족으로 신분을 세탁하곤 한다. 최근 유튜브 영상에서는 일본을 여행 중인 중국 남성이 식당에서 시끄럽게 떠들다 주인에게서 주의를 받자 한국인 행세를 했다. 해외여행 도중 부끄러운 행동을 하다 발각된 뒤 일본어로 말하는 어글리 코리안들도 있다. 자국의 명예를 지키려는 애국심의 발로라기엔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태들이다.

미국 여행객들이 해외 여행지에서 가방 등에 단풍잎이 들어간 캐나다 국기를 달고 다니며 캐나다인 행세를 하고 있다고 미국 CNN방송이 최근 보도했다. 미국의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고조된 반미 정서를 의식해 국적을 속이는 ‘플래그 재킹’(flag jacking·깃발 속이기)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 미국이 9·11 테러 응징 차원에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도 미국인의 플래그 재킹이 빈번했다. 미국 내에선 ‘우선주의’ 깃발이 펄럭이는데 밖에선 자국민이 손가락질 받는다. 완력을 휘두르며 군사·경제력 같은 ‘하드 파워’를 키우려다 매력 자본인 ‘소프트 파워’를 잃어가고 있는 미국의 현주소다.


오피니언

포토

박보영 '뽀블리의 미소'
  • 박보영 '뽀블리의 미소'
  • [포토] 고윤정 '반가운 손인사'
  • 임지연 '매력적인 미소'
  • 손예진 '해맑은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