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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같은 X" 욕설까지…출근길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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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3-06 18:46:32 수정 : 2012-03-07 15:2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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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땐 접대부·대리기사 취급… "조폭문화 따로 없어"
직장인 대부분 조직 내 상하관계 정신적 폭력 시달려
부적응자 낙인 두려워 피해 경험자 84% “참는다”
폭력이 진화하고 있다. ‘물리적 폭력’이 사라진 조직은 겉으로보면 평화로워보이지만 내부에는 교묘하고 은밀한 ‘정신적 폭력’이 꿈틀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풍선효과’라고 설명한다. 물리적 폭력이 통용되지 않는 분위기에서 폭력은 그 모습을 바꿔 ‘조직원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끊임없이 존재한다는 것. 조직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정신적 폭력은 조직원들을 순응시키고 이에 반기를 드는 이들에게는 ‘부적응자’라는 낙인을 찍어 조직에서 걸러낸다. 

취재팀은 직장인 10명을 심층 인터뷰해 그들이 느끼는 직장내의 정신적 폭력에 대해 알아봤다. 취업포털사이트 ‘잡코리아’의 협조를 얻어 직장인 376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도 진행했다.

“한 직장상사는 ‘너는 에미애비도 없냐, 돼먹지 못한 놈’이라고 저주를 퍼부어요. 어머니가 얼마 전에 돌아가신 걸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말이죠….”

A(32)씨는 매일 출근길이 두렵다. 자신에게만 폭언과 욕설을 퍼붓는 상사와 부대껴야 하기 때문이다. 소규모 작업장이라 딱히 피할 곳도 없다. A씨는 “어느날 일감이 밀려 철야를 하고 나서, 출근하는 상사에게 ‘이렇게 일이 쌓였는데 나몰라라 가시면 서운하다’고 말했는데 그 후로 내가 공격 대상이 됐다”며 “그 바람에 스트레스가 쌓여 불면증까지 생겼다”고 토로했다.

취재진이 만나 본 직장인들은 대부분 한 가지 이상의 정신적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해자는 대부분 상사였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문제 제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더 심한 폭력과 괴롭힘에 시달릴 것이라는 두려움, ‘부적응자’라는 낙인이 찍힐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이들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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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같은 X, 나는 너를 사람으로 안 본다”

언어폭력은 직장에서 경험하는 대표적인 정신적 폭력이다. B(26·여)씨는 선배의 욕설을 견디지 못하고 입사 1년도 채 안 돼 사직서를 냈다. 선배는 “더워 죽겠는데 왜 에어컨도 안 틀어놨냐 XXX야” 등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아 욕설을 쏟아내곤 했다. A씨는 “나한테는 ‘사수’ 역할을 했던 선배인데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며 “그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릴 정도인데 주변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게 더 충격적이었다”고 하소연했다.

이 같은 언어폭력은 학력·외모 비하에서부터 인격 모독적 발언, 직접적인 욕설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C(30·여)씨는 상사에게 “돼지야, 난 너를 사람으로 안 봐”라는 욕을 먹고 사과를 요구했지만 묵살당했다. D(32)씨는 “실수할 때마다 ‘XX대학 나온 놈들은 다 그러냐’며 폭언을 일삼는 선배 때문에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떤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고 털어놨다.

◆회식 땐 상사의 접대부

회식은 직장 내 상하관계에서 비롯되는 폭력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리다. 신입사원 E(27·여)씨는 “2차로 노래방을 가면 연차가 낮은 사원들은 무조건 노래 부르고 춤을 춰야 한다”며 “가끔 상사들이 노래 잘한다며 용돈을 찔러줄 때면 마치 접대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F(29)씨는 “1차에서는 맥주컵에 소주를 따라서 원샷을 시키고, 2차로 노래방에 갈 때는 평사원들을 골목마다 배치해 놓고 ‘상무님 이쪽입니다’ 하고 안내를 시킨다”며 “조폭문화가 따로 없다”고 말했다.

중요한 회식을 앞두고는 장기자랑 준비가 필수인 곳도 있다. G(30)씨는 “회사 근처에 연습실까지 빌려 놓고 장기자랑을 준비하라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그렇게 했는데도 부장들 마음에 안 든다고 혼을 내는 바람에 회사를 그만둔 동료도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최근 IT업체로 이직했는데, 선약이 있으면 회식에 빠져도 되는 걸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내가 대리운전 기사냐?

영업직 4년차 H(30)씨는 회식 다음날이 더 두렵다. 상사가 회사에 두고 간 차를 몰고 상사 집까지 모시러 가려면 평소보다 2시간은 더 일찍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대리기사를 부르는 값이나 택시비나 얼마 차이도 안 나는데 상사가 꼭 택시를 타고 집에 간다. 다음날 출근을 편하게 하려는 것”이라며 “오히려 ‘내가 너를 콕 집어 이런 임무를 주는 걸 고맙게 여기라’고 하는데 어처구니가 없다”고 말했다.

상사들이 당연한 듯 시키는 사적인 심부름도 ‘공공의 적’이다. I(28)씨는 상사가 수리를 맡긴 가전제품을 찾아오거나 개인 약속장소를 예약하는 일 등 업무와 관계없는 모든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면서 불평불만을 내색조차 못한다. 그는 “일보다 심부름이 더 큰 스트레스”라며 “내가 상사 시중 들려고 회사에 들어온거냐”고 고충을 토로했다.

◆“직장생활이 다 그렇지…뭐”

취재진이 만난 직장인들은 이렇게 폭력인 듯 아닌 듯 교묘하고 은밀하게 작동하는 폭력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이직 퇴직의 꿈은 꾸지만 저항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설문조사를 보면 직장폭력 피해 경험자의 84.6%가 “그냥 참았다”고 했고, 그 이유로는 “조직문화가 다 이런 식이라고 생각해서”(61.4%)를 가장 많이 꼽았다.

체념은 경험을 통해 자연스레 습득됐다. J(30·여)씨는 “상사와 충돌했던 선배들은 어김없이 인사고과에서 물을 먹었고, 심할 경우에는 전체 부원한테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며 “그런 걸 보면 나도 잘못했다간 조직에서 밀려나게 될까 무섭다”고 말했다.

중앙대 전병준 교수(경영학)는 “조직 내 정신적 폭력은 일종의 충성심을 테스트하는 과정”이라며 “시키는 대로 말 잘듣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조직의 본능”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또 “한국 조직문화는 동질성을 강요하기 때문에 집단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부적응자로 낙인찍고 교묘한 방식으로 응징에 들어간다”며 “조직원들은 조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폭력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응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김유나·오현태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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