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 개혁 꿈꿨지만 ‘삼일천하’로
1884년 12월4일(음력 10월17일) 우정총국의 개국을 축하하는 낙성식(落成式)이 열렸다. 그러나 이날의 축하연은 곧바로 처참한 살육의 현장으로 변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이 이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서울 종로구 조계사 옆에 위치했던 우정총국은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적 우편 업무를 위해 설치된 기관으로 초대 책임자인 총판은 홍영식이었다. 현재 명동 서울중앙우체국 앞에 홍영식 동상이 있는 것은 우정총국 초대 총판이었던 그를 기억하기 위함이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급진개화파들은 동료 홍영식이 책임자로 있는 우정총국의 개국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1884년 12월4일의 ‘고종실록’은 “이날 밤 우정국에서 낙성식 연회를 가졌는데 총판 홍영식이 주관하였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에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민영익도 우영사로서 연회에 참가하였다가 불을 끄려고 먼저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는데, 밖에서 여러 흉도들이 칼을 휘두르자 나아가 맞받아치다가 민영익이 칼을 맞고 대청 위에 돌아와서 쓰러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지자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궐내로 들어가 곧바로 침전에 이르러 변고에 대하여 급히 아뢰고 속히 거처를 옮겨 변고를 피할 것을 청하였다”고 급박하게 전개되었던 그날의 정황을 기록하고 있다. 개화파가 제거 1순위로 삼은 수구파의 핵심 민영익은 중상을 입었으나, 서양인 의사 알렌의 치료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알렌의 의술을 높이 평가한 고종이 최초의 근대식 의료 기관인 제중원을 설립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개화파들은 우정총국의 거사 성공을 확인한 후 바로 고종이 거처한 창덕궁으로 향했다. 사전 계획대로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으로 납치해 오기 위해서였다. 경우궁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를 모신 사당으로, 개화파가 왕과 왕비의 거처를 이곳으로 옮긴 목적은 공간이 협소하여 고종을 압박하기가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개화파들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후원을 약속받았고, 실제 일본 공사관에서는 150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창덕궁의 서문인 금호문과 경우궁 사이를 경계하면서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청나라 군대 상당수가 조선을 빠져나갔다는 점도 거사일을 정하는 데 고려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가 조선에 병력을 지원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거사 다음 날 개화파는 왕명을 빙자하여 수구파들을 경우궁으로 오게 했고, 이곳에서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조영하, 민영목, 민태호 등 수구파 대신, 고종의 수라를 준비하던 내시 유재현 등을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고종이 죽이지 말라고 하교했지만, 개화파는 이를 듣지 않았다. 이날만은 왕보다도 개화파들의 권력이 위에 있었던 것이다. 고종을 압박하여 개화파들이 발표한 혁신 정강은 김옥균이 쓴 ‘갑신일록’에 모두 14개 조로 기록되어 있는데, 1868년에 단행된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받은 내용들이 많았다.
정변을 일시적으로 성공시켰던 개화파의 위세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경우궁을 벗어나, 창덕궁으로 환궁하면서 급격히 무너지게 된다. 조선의 중요성을 인식한 청나라가 군대를 급히 파견했고, 창덕궁을 포위하면서 개화파 공격에 나섰다. 위안스카이가 지휘하는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자, 일본은 개화파 지원에서 한 발 물러섰다. 홍영식과 박영교 등은 현장에서 피살되었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정변이 일시 성공했지만 개화파의 권력은 3일 만에 그쳤기에, 갑신정변은 흔히 ‘삼일천하’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차가운 겨울의 초입에 일어났던 갑신정변은 개화와 근대화라는 좋은 목표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이상적으로 추진하였기에 실패한 정변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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