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4년 12월, 나치 독일은 동쪽에서는 소련군, 서쪽에서는 미·영 연합군이 국경까지 진격하며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히틀러는 1940년 프랑스를 무너뜨린 아르덴 숲 기습 작전을 되살려 전세를 뒤집고 정치적 성과를 달성하고자 했다. 히틀러의 계획대로 독일군은 아르덴 숲 일대의 미군을 공격하여 연합군의 주요 보급 항구였던 안트베르펜을 점령하고, 미·영 연합군을 분리해 영국군을 포위하려 했다. 이 작전을 성공시켜 미·영과 평화협정을 맺고 서부전선을 정리한 후, 남은 병력을 총동원해 동쪽의 소련과 결전을 벌이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전차를 앞세워 신속한 돌파를 시도했던 독일군의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1940년의 ‘전격전’과 결과가 달랐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병참 문제였다. 장기간의 전쟁과 전선 확장으로 인해 이 작전에 투입할 연료와 보급품이 부족했다. 둘째, 독일군은 흐린 날씨를 이용해 연합군의 제공권을 무력화하려 했으나, 작전 중 날씨가 맑아지면서 연합군의 공중 공격을 막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예상보다 강한 미군의 저항과 신속한 대응이 있었다. 특히 전략적 요충지인 바스토뉴에서 미 101공수사단은 수적 열세와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열흘 동안 포위된 상황에서 끝까지 버텼다. 독일의 기습을 받은 연합군 지휘부는 즉각 대응했으며, 조지 패튼 장군이 이끄는 제3군은 신속한 기동력을 발휘해 바스토뉴에 갇힌 미군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군은 전선을 일시적으로 돌파하며, 미군이 이 전투를 ‘벌지(돌파구)’ 전투라고 부를 정도로 강력한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히틀러는 목표를 절반도 달성하지 못한 채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결국 공세의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의 아르덴 공세는 전력이 부족한 독일군이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한 연합군의 허를 찔러 전세를 뒤집겠다는, 현실성이 극히 낮은 무모한 도박이었다. 히틀러는 절박한 상황에서 냉철한 전략적 판단 대신 희망적 사고에 기대어 남은 전력을 소진했고, 이는 결국 독일의 패망을 6개월 앞당기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오히려 히틀러가 일본처럼 극단적인 방식까지 동원하며 끝까지 방어전을 지속해 시간을 벌고, 연합군에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의 ‘만약’은 없지만, 그가 기대했던 미·영과 소련 간의 균열을 이용해 정치적 협상을 모색했다면, 그의 운명은 과연 달라질 수 있었을지 궁금해진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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