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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무릎 꿇고 뵐 ‘생활의 아버지’

입력 : 2014-09-11 20:12:32 수정 : 2014-09-11 20: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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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시집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시력 30년을 넘긴 두 중견 시인이 나란히 새 시집을 펴냈다. 이재무(56) 시인의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실천문학사)와 김경미(55) 시인의 ‘밤의 입국 심사’가 그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세상에 나왔고 시단에 나온 해(1983)도 같다. 같은 세월을 흘러왔지만, 시를 길어올리는 수원(水源)은 다르다.


슬픔에 무릎을 꿇는다고 지는 건 아니다. 고개 빳빳이 들어 하늘 향해 삿대질한다고 이기는 것도 아니다. 슬픔을 알지 못하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알아도 외면하면 독이 되어 쌓인다. 차라리 무릎 꿇고 경배할 때 비로소 따스한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이재무 시인은 그 슬픔을 ‘생활의 아버지’로 모신다.

“어항 속 물을// 물로 씻어내듯이//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시인은 생활 속에서 시를 길어올린다. 시를 모시기 위해 걷고 또 걷는다. 그는 “굳이 신기하거나 생경한 것에서 시를 구하지” 않고 “생활에서 구한 대상들에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뿐”이라고 말한다. 길에서 구한 “그것은 이미지로 오기도 하고 은유로 오기도” 하는데 “나를 찾아온 이 귀한 손님들을 고이 데려와 컴퓨터 속에” 모셔놓고 청탁한 지면에 시집보낼 날을 기다린다. 몸 속으로 난 길을 발견한 이 시편도 그렇게 길에서 얻었다.

“누수처럼 느릿느릿/ 걷고 있는 노인의 몸에서/ 가닥가닥 풀린 길들/ 시나브로 흘러나오고 있다// 대관절 저 구부정한,/ 마른 장작 같은 몸피 속에는/ 얼마나 많은, 젖은 길들/ 엇꼬여 쟁여 있는 것일까// 여생이란 무엇인가/ 몸 안에 똬리 튼 길들/ 하나, 하나 어르고 달래/ 밖으로 흘려보내는 일 아닌가”(‘여생’)

젊거나 늙거나 미래는 모두 여생(餘生)이다. 길은 어디서 끊어질지 모른다. 밖으로 난 길이 끊어지기 전에 몸 안에 ‘엇꼬여 쟁여 있는’ 길부터 풀어낼 일이다. 그 꼬여서 아픈 길, 어르고 달래 밖으로 보내는 일이 여생의 몫이라니, 시인은 길에서 제대로 길을 찾은 셈이다. 그리하여 창공에 길을 내며 날아가는 새들을 향해 “밤새 딱딱하게 녹슨 공기” 잘게 부수고 “강철 날개 저어” 돌올하게 솟구치는 “저, 날렵한 비상”이라고 외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강변에서 길어올린 ‘길동이’와의 여생은 어떤가.

“일주일에 네댓 번/ 한강변 거닐 때는 밤섬에 들어가/ …/ 파리 떼처럼 악착같이 달려드는/ 냄새와 소음 훌훌 털고 들어간 율도국에서/ 소식 듣고 달려온 길동과 천렵을 하거나/ 여의도 오가며 이착륙 반복하는/ 철새 편대들에게 주먹감자나 먹이다가/ 풀밭에 누워/ 실컷 햇빛만 쏘이다 온다”(‘밤섬’)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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