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각종 재판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된 현직 법관이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날 법정에서는 같은 재판부에 배당된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이 언급되기도 했다.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부장판사 송인권) 심리로 열린 임성근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첫 재판에서 임 부장판사 측은 “직권남용죄를 물을 수 없다”면서 혐의를 부인했다.
임 부장판사 측 변호인은 “직권남용죄가 성립하려면 남용의 대상이 되는 ‘직권’이 있어야 한다”면서 “임 부장판사는 법적으로 재판에 개입할 직무 권한 자체가 없으므로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현재 진행 중인 재판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은 그 어디에도 없고, 재판권은 재판장의 신성불가침한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남용할 권한 자체가 없으므로 죄형법정주의(범죄와 형벌은 법률로 정해져야 한다는 주의)에 어긋난다는 취지다.
이어 “피고인의 행위는 담당 판사에게 단순히 조언하거나 권고한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검찰이 재판 개입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판사 3명은 각자의 판단에 따라 재판을 했다고 주장했다. 임 부장판사의 행동이 판사들의 의사결정의 자유나 재판권을 침해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임 부장판사 측 변호인의 해석에 의문을 표시했다. 재판부는 “변호인 측 주장에 따르면 폭행이나 협박이 없는 이상 판사들은 대법원장을 비롯한 누구든 재판권에 실질적 영향을 미쳐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라면서 “아무리 죄형법정주의라고 하지만 그런 해석이 정말 옳은지 추후 검토해달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공소사실에 따르면 임 부장판사가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의 부하직원과 비슷한 ‘중간고리’ 역할을 했다고 봤다. 재판부는 “환경부 블랙리스트는 피고인이 부하직원을 시켜서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의 사직서를 제출하게 한 것이고, 이 사건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피고인(임 부장판사)을 시켜 해당 사건 재판부에 판결 이유 등을 수정하게 했다는 것”이라면서 “그런데 하나(환경부 블랙리스트)는 중간단계를 기소하지 않았고, 하나(재판 개입 사건)는 공동정범으로 기소했다”면서 일관성 문제를 지적했다.
임 부장판사는 2015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로 재직하면서 임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지시를 받고 ‘세월호 7시간’ 관련 기사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재판에 개입해 청와대 입장을 적극 반영하도록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들의 체포치상 사건과 오승환·임창용 프로야구 선수 원정도박 사건 재판에 개입한 혐의도 받고 있다.
유지혜 기자 keep@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