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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만 믿을 순 없다”… 푸틴, 잠자던 ‘자주국방’을 깨웠다 [박수찬의 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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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3-05 06:00:00 수정 : 2022-03-05 16:5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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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일 국가안보회의 전화회의를 앞두고 생각에 잠겨있다. AFP 연합뉴스

“트럼프가 하지 못한 것을 푸틴이 해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세계 각국의 안보정책을 강하게 흔들고 있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과의 다자 또는 양자 동맹 관계에 의존하며 평화를 누려왔던 유럽과 인도태평양 국가들은 미국의 군비 증강 요구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무모한 침공으로 이같은 기조가 바뀌고 있다. 군비 축소 대신 대대적인 무기 도입이 잇따라 추진 중이다.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해왔던 미국이 국제분쟁에 군사 개입하는 것을 꺼리면서 대규모 전쟁을 대비해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야 하는 ‘자주국방’ 시대가 열리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유럽, 대대적 군비증강 조짐 

 

독일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1주일만에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기존 정책을 폐기, 러시아와의 대결 준비에 나섰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지난달 27일 “푸틴을 경계하고 그 위협에 맞서기 위해 우리가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자문해야 한다”며 군비증강에 1000억유로(약 134조8900억 원)를 즉각 투자하고, 매년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을 국방비로 지출하겠다고 밝혔다.

 

노후한 토네이도 전폭기를 대체하기 위해 미국에서 F-35 스텔스 전투기를 도입하고, 이스라엘산 드론 구매도 추진한다. 

 

리투아니아에 파견된 독일 육군 장병들이 지휘관으로부터 지시를 듣고 있다. AFP 연합뉴스

프랑스, 스페인과 추진중인 6세대 전투기 공동개발 프로그램 미래항공전투체계(FCAS)와 더불어 독일군에 영상정보를 제공할 유로드론 개발도 우선순위에 포함됐다.

 

독일이 도입할 F-35A는 러시아의 핵위협에 대응하는 전력이 될 전망이다. 앞서 2020년 8월 미국은 F-35A에서 B61-12 전술핵폭탄을 투하하는데 성공했다.

 

과거 독일은 F-35A에 관심을 보였지만, 실질적인 진전은 없었다. 대신 프랑스와 6세대 전투기 공동개발을 추진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F-35A 도입을 결정하게 됐다.

 

숄츠 총리의 선언을 놓고 “역대 미국 대통령이 못한 것을 푸틴이 해냈다”는 말이 나온다. 

 

독일은 전통적으로 외교와 통상에 의한 문제 해결을 선호해왔다. 냉전 이후에는 군비 축소가 이뤄지면서 이같은 기조가 강화됐다. 1989년 50만명이던 병력은 18만명으로, 전차는 5000대에서 300대 수준으로 감축했다. 

 

그나마 남은 장비도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 2018년 독일 매체들은 타이푼 전투기 128대 중 4대만이 비상 상황 발생 시 실전투입이 가능하다고 전했다. 전차와 장갑차, 잠수함, 수송기도 절반 이상이 실전에 쓰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국방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1.3%에 불과했다. 이를 두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유럽이 자국의 안보를 등한시하는데 미국이 세금으로 유럽 안보를 지켜주는 것은 불공정하다”며 북대서양조약기구 탈퇴를 위협할 정도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녹슨 군대’라는 오명을 듣던 독일군을 바꾸고, 미국에 대한 안보의존도를 낮추는 기회가 됐다는 평가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2일 국방 분야에 대한 투자를 늘리겠다고 밝혔다. 

독일 공군 무장사들이 타이푼 전투기에 미티어 공대공미사일을 장착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프랑스는 2017년부터 국방예산을 증액해왔다. 이를 통해 재규어, 그리폰 장갑차를 도입하고 미래항공전투체계(FCAS), 차세대 핵항모 건조 등을 추진했다.

 

하지만 지난달 프랑스 의회에 제출된 보고서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전면전 상황에 대응하기에는 재래식 전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아프리카에서 대테러작전을 펼치는 것은 가능하지만, 고강도 분쟁에 맞는 수준의 군사력을 갖추려면 기존보다 훨씬 많은 예산이 필요한 실정이다.

 

집단안보 원칙을 담은 북대서양조약기구 헌장 제5조에 의존해온 동유럽은 비상이 걸렸다. 

 

미국에서 M-1A2 전차 250대 도입을 확정한 폴란드는 MQ-9 리퍼 중고도 무인기를 긴급구매하는 방안을 서두르고 있다. 군 병력도 현재의 2배인 30만 명으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라트비아를 비롯한 발트 3국도 무기 구입에 나서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25년까지 5000명 규모의 유럽 합동군을 창설할 계획이다. “우리가 진정한 유럽의 군대를 갖겠다고 결심하지 않는 한 유럽을 보호하지 못할 것”이라던 마크롱 대통령의 주장이 현실화되는 셈이다.

프랑스 군인들이 파리 에펠탑 주변을 순찰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한반도 방위의 한국화’ 서둘러야

 

북대서양조약기구가 규정한 다자안보 체제의 혜택을 받는 유럽 국가들의 독자적인 전력증강 움직임은 “유럽의 안보는 유럽이 해결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과 무관치 않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단기적으로는 유럽에 9만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에 대한 안보의존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전면전을 치를 준비가 부족한 유럽 국가들로서는 군사력을 충분히 늘릴 때까지는 미국의 안보 지원을 외면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처럼 유럽 지역 안보에 중대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모든 것을 맡길 가능성은 낮다. 

독일 육군 퓨마 장갑차와 레오파드 전차가 기동훈련을 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오바마 행정부 시절부터 미국이 해외 분쟁에 군사적 개입을 자제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유럽의 안보 지형을 결정하는 자리에 EU가 구경꾼이 될 수는 없다. 유럽 안보는 미국·러시아의 문제가 아닌 EU가 관련된 문제”라고 말했다.

 

한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미국의 안보 지원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 유사시 수십만명의 병력을 파견하는 작계 5027은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이라크, 아프간 전쟁으로 수천명의 희생자를 낸 미국이 냉전 시절처럼 한반도에 대규모 지상군 파병을 할 지도 미지수다.

 

방어와 반격이 동시에 진행되는 작계 5015를 감안하면, 실질적인 지상전은 한국이 맡게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전략적 자율성을 높일 필요가 큰 셈이다.

한미 육군 장병들이 박격포 사격훈련을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12월 서욱 국방부 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부 장관은 제53차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새로운 전략기획지침(SPG)을 승인했다. 

 

전략기획지침은 새로운 작계를 만들거나 기존 작계를 대폭 수정할 때 국방장관이 합참 등에 지시하는 가이드라인이다. 이에 따라 한·미 군 당국은 첨단 신무기와 작전 개념을 활용한 대응 방안이 포함된 작계를 새롭게 마련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맞설 확장억제는 한미동맹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그 이외의 분야에서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핵을 제외한 나머지 위협은 한국군이 주도적으로 대응한다”는 원칙을 갖고 한반도 안보 정세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욱 국방부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부장관이 지난해 12월 2일 한미안보협의회를 마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냉전 이후 굳어진 유럽의 정세를 러시아가 힘으로 바꾸려는 시도다.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에 따라 북한도 유사한 방법으로 현상 변경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과 긴밀히 공조하면서도 자체적인 방위력과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하는 ‘자주국방’ 노선을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북한과 미국의 힘겨루기를 지켜보기만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한반도 방위의 한국화’가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하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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