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제대로 길을 지키면 천 명을 두렵게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막바지였던 1597년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같은 말을 남겼다. 규모는 작지만, 결정적인 장소와 시간에 나타나는 군대는 적군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현대에도 이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 무기가 있다. 잠수함이다.
항공모함이나 순양함보다 훨씬 작은 잠수함도 수중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면서 결정적 순간에 기습을 가하면, 그 위력은 매우 크다. 세계 각국이 잠수함을 도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해군도 1992년 장보고함을 취역시켜 본격적인 잠수함 시대를 열었다. 현재는 주요 장비를 국산화한 장보고-Ⅲ 배치(Batch)Ⅱ를 건조했고, 2030년대에는 장보고-Ⅳ를 확보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장보고-Ⅳ가 순조롭게 전력화되면 장보고급·손원일급으로 불리는 장보고-Ⅰ·Ⅱ, 도산안창호급이라고 알려진 장보고-Ⅲ 배치Ⅰ보다도 성능 면에서 우수한 잠수함을 얻게 된다. 해군의 수중 전력이 그만큼 강해지는 셈이다.
◆이르면 2030년대 장보고-Ⅳ 등장 가능성
해군은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에서 방위사업청 주최로 열린 국제 잠수함 기술 컨퍼런스에서 2040년대 이후까지 감안한 잠수함 전력 계획을 공개했다.
해군의 잠수함 전력 계획은 △현재 잠수함 척수 유지 △장보고-III 배치II에 기반한 미래 잠수함 개발(연료전지+리튬이온전지) △장보고-I 대체를 위한 지속적인 KSS-III 전력 증강 △향후 KSS-IV 소요 추진으로 구성된다.
1990년대부터 9척이 배치된 장보고-Ⅰ은 6척이 통합전투체계와 음파탐지기를 바꾸고 공격잠망경 해상도를 높이는 등의 성능개량을 통해 장보고-Ⅱ와 맞먹는 수준으로 성능을 높였다.
2007년 1번함이 취역한 장보고-Ⅱ는 내년부터 203년까지 6척이 성능개량에 들어갈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상황에서 기존 규모를 유지하려면 추가 소요가 필수다. 2021년부터 3척이 건조에 들어간 3600t급 장보고-III 배치II는 이같은 소요를 충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을 전망이다.
국내 기술로 만든 잠수함 중에서 가장 정점에 있는 장보고-III 배치II는 세계 2번째로 리튬이온전지를 탑재해 수중 작전능력이 크게 향상됐다.
리튬이온전지는 납축전지보다 같은 공간에 더 많은 용량의 배터리를 탑재한다. 잠항거리는 160%, 최대속도 잠항시간은 300% 연장되고 수명도 2배로 늘어난다.
여기에 연료전지와 결합된 공기불요추진체계(AIP)와 디젤엔진이 더해진다. 동력과 잠항시간 및 거리 등에선 세계 최고 수준이다.
탄도미사일을 싣는 수직발사체계(VLS)는 발사관 수량이 6개에서 10개로 늘어났다. 최신 소음 저감 기술로 정숙성을 높였고, 말굽형 음파탐지기를 장착해 수중 탐지능력도 크게 향상됐다. 주요 구성품을 국내 개발, 국산화율이 80%에 달한다.
컨퍼런스에서 만난 해군 관계자는 “장보고-III 배치II는 일본의 소류급이나 타이게이급보다 추진력 등에서 우수하다”며 “지금까지 만든 잠수함 중 최고 수준”이라고 말했다.
해군은 장보고-III 배치II를 토대로 미래 잠수함을 개발한다는 방침이다. 이는 4000t급으로 예상되는 장보고-III 배치Ⅲ로 해석된다.
이르면 2028년쯤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이는 장보고-Ⅳ는 장보고-III 배치II의기술을 발전시키면서 기술의 상호 호환성을 확보할 방침이다.
소요제기 직후 소요결정-선행연구-소요검증의 순서로 진행되던 소요기획 절차를 합치는 통합소요기획 제도가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
전체적인 크기나 외형에 대해선 전망이 엇갈린다. 해군 안팎에선 승조원 편의성이 중시되는 세계적 추세를 감안해 장보고-III 배치II보다 다소나마 배수량이 늘어날 가능성이 거론된다.
반면 업계 등에선 기술적으로 잠수함 크기를 더 늘리기는 쉽지 않다는 점을 들어 수직발사체계 등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배수량이 감소할 가능성도 나온다.
이날 컨퍼런스에서 방위사업청이 발표한 ‘한국형 잠수함 개발 현황 및 획득 전략’에선 미래 잠수함 핵심 기술개발이 언급됐다. 해당 기술 중 일부는 장보고-Ⅳ에도 반영될 수 있다.
함형 관련 기술의 경우 잠수함이 적에게 노출될 위험을 낮추는 것과 관련이 깊다. 이를 위해선 구조물에서 나는 소음과 유동소음(잠수함이 나아갈 때 선체에 타고 흐르는 유체가 추진기와 만나 발생하는 소음)을 억제해야 한다.
따라서 선체를 최대한 유선형으로 설계해야 한다. 잠항타의 위치와 형태 등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추진체계는 전고체전지가 적용될 수 있다. 리튬이온전지는 고온이나 외부 충격에서 화재나 폭발 위험이 크다. 안전장치를 추가하면 위험이 대폭 감소하지만 중량이나 부피가 증가한다.
전고체전지는 리튬이온전지 내 전해질을 분말 형태의 고체로 대체한 것이다. 양극과 음극의 접촉을 차단해 화재나 폭발 위험을 줄인다.
온도 변화나 외부 충격에 따른 누액, 산화 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적어 편의성과 내구성 향상, 유지보수비 감소 효과가 있다. 음극이 아예 없는 무음극 기술을 적용한 것도 연구 중이다.
인공지능(AI) 기술 적용도 거론된다. 잠수함 내 손상통제체계 감시능력을 강화하는 것과 더불어 음파탐지기에 AI를 결합하는 연구도 진행중이다.
LIG넥스원은 AI와 기계학습(ML)에 기반한 스마트 음파탐지기를 개발하고 있다. 음탐사에 의한 탐지는 인간 개개인의 능력과 숙련도가 서로 달라서 탐지율 등이 일정하지 않다. 반면 AI는 탐지능력이 일정하므로 인간의 오차를 최소화한다.
스마트 음파탐지기는 AI로 데이터를 실시간 학습하고 환경 변화에 적응해 자동으로 표적을 탐지 및 분석하고 방위를 정밀 추적한다. 저소음 표적 탐지능력을 강화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을 지원한다. 승조원들은 전술적 판단에 집중할 수 있다.
이같은 작전을 위해 사전에 가상 음향환경을 시뮬레이션해서 학습용 데이터를 생성, 학습을 하고 추적 및 식별 기술을 개발하게 된다.
◆잠수함 수출 준비도 활발
국내 조선업계는 그동안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해외 잠재적 고객에게 판매할 것을 감안한 ‘맞춤형 모델’도 준비하고 있다.
향후 10년간 재래식 잠수함이 세계적으로 126척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들 중 일부만이라도 수주한다면 상당한 산업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한화오션은 장보고-III 배치II를 수출 기본형 잠수함으로 제안하고 있다. 음파탐지기와 전투체계 등의 장비 130여종을 국산화해 중국산 장비로 인한 보안 위험을 없앴고, AIP와 리튬이온전지를 결합해 세계 최고 수준의 잠항능력을 갖췄다.
한화오션은 다른 선진국의 신형 잠수함보다 기술적 신뢰성과 데이터가 더 많이 축적되어 있다는 입장이다.
독일 212CD 잠수함은 지난해 건조가 시작, 1번함이 2029년 인도될 예정이다. 스웨덴의 A26 잠수함은 2028년에 인도된다. 프랑스의 블랙 소드 바라쿠다는 2034년에 1번함이 나온다.
반면 장보고-III 배치Ⅰ은 2021년 1번함이 인도됐고, 리튬이온전지를 쓰는 장보고-III 배치II는 2027년에 해군이 인수할 예정이다. 2028년엔 1번함 창정비를 실시한다.
선진국 신형 잠수함이 첫 인도를 시작할 시점에 한국은 창정비를 수행하는 단계에 이르는 셈이다. 이같은 경험을 통해 구매국에 최적의 운영 방안을 제안할 수 있다고 한화오션 측은 설명했다.
장보고-III의 크기를 줄인 오션 2000 잠수함도 소개됐다. 대우조선해양 시절인 2020년에 모형 시험을 완료한 오션 2000은 현재 기본설계는 이뤄진 상태로 알려졌다.
AIP와 리튬이온전지를 사용하며 X형 타기(배의 키)를 장착한다. 무장발사관은 8개다. 전반적으로는 손원일급 잠수함의 성능 강화형으로 평가된다.
이보다 크기가 작은 오션 1400은 인도네시아에 나가파사급이란 이름으로 수출됐다. 한국 해군에서 성능개량을 거친 장보고급 잠수함과 유사한 성능을 지니고 있다.
해군도 잠수함 수출과 관련, 국제협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우선 잠수함 획득 단계별 노하우와 더불어 한국 해역에서의 시험평가를 지원한다. 교육훈련과 무장 운용 및 정비 협력, 수리부속 공급망 유지 등도 지원 대상에 포함된다.
해군의 정비개념 및 외주정비 현황을 공유하며, 수리부속 상호 공급체계 구축도 추진한다.
한국의 잠수함은 짧은 기간에 압축적인 성장을 이뤘다. 이를 통해 영해 수호와 산업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30여년간의 노력 끝에 잠수함 공급망과 산업 및 군사적 시스템을 구축한 지금, 잠수함 기술 개발을 더욱 강화하고 수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규모의 경제’를 키울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잠수함을 둘러싼 군과 업계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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